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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이상태(2020-03-29 00:39:44, Hit : 442, Vote : 11
 (설교칼럼) 돌보시는 하나님 (창세기 21) (요한복음 4)

주일예배 (2020/03/29)
가정예배 (강해설교요약)
=======================
본문성구: 창세기 21:8-19
설교주제: 돌보시는 하나님


[1]
지난해 말부터 중국의 우한 지역에서 시작되어 지금은 전세계로 퍼지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COVID19)와 관련하여 날마다 새로운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 취약계층 (脆弱階層)의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되고 감염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질병관리 전문가들이) 우려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영국 왕실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찰스) 왕세자, (보리스 존슨) 영국 수상 그리고 (멧 헨콕) 보건부
장관 등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양성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느니라" (마태
복음 5:45 )(개역개정)고 말씀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지금 전세계로 퍼지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질병(疾病)은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사회적 신분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구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다가
올 수 있는 재난(災難)의 보편성을 깨우쳐 주는 듯합니다.  

지역봉쇄(地域封鎖)(Regional Blockade/Containment), 사회적 거리두기 (Social
-Distancing). 자가격리(自家 隔離) (Self-Isolation) (Self-Quarantine) 등등 다소
불편한 용어들이 이제는 매우 익숙한 일상어가 되어버린 가운데 오늘도 우리들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과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2]
(지난주일에 우리가 함께 살펴본) (창세기 16장의 기록에 따르면)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람(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16:16). (창세기 17장의 기록에
따르면)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17:1) 여호와께서 (거의 13년 만에)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란 뜻)
으로 개명(改名)을 해주시고 (17:5) 그의 아내의 이름도 "사래"에서 "사라"로 바꾸어
주십니다 (17:15).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하여 (내년 이 시기에) "아들을 낳을것이니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17:19, 21). 또한 (하갈을 통하여 이미
얻은 아들)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축복의 말씀을 전해주시는데 이때 즈음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 였습니다 (17:20, 25). (창세기 18장의 기록에 따르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때 즈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8:10)라고 다시 확증해 주십니다.  

[참고] 이런 일련의 일들이 있은 후에 죄악이 가득했던 소돔과 고모라 성읍들이 멸망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18:16-33; 19:1-29). 그리고 예전에 아브람(아브라함)이 애굽
왕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소개했던 미묘한 일이 있었는데 (12:10-20) ...
"세 살 버릇 여든 까지 간다 (Old habits die hard)"는 속담이 무색하게도 (아브라함이
여든이 훨씬 지난 나이에) 이번에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
라고 말하고 또 한바탕 사건이 벌어집니다 (창세기 20:1-18 참조). [도대체 '아브라함'
으로 이름까지 바꾼 사람이 왜 또 이런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


[3]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던 해에 사라가 아들을 낳고 (하나님께서 미리 지어주신 대로)
그 아기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부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웃음(Laughter)"과
관계가 있습니다. (백 세에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정말 기뻤는지
아니면 믿기지 않고 그냥 우스웠는지는 우리가 모르지만]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고
(17:17)... 사라는 [그 말이 도무지 믿기지를 않아] 속으로 웃었고 (18:12)... 드디어
"이삭"이 태어났을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십중팔구 정말로 기뻐하며] 웃었습니다
(21:6). [이렇게 아브라함과 사라와 축하객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웃었을 때마다
하나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아기 이삭이 젖을 떼는 시기 즉 모유수유(母乳授乳)를 중단하는 때가 다가왔습니다.
(세계보건기구와 유니세프 그리고 대한소아과학회 등에서) 나온 의학자료들을 보면
아기에게서 젖을 떼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는 두 돌 무렵이라고 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젖 떼는 시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늦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젖을 뗄 때 그의 나이가 서너 살 정도였겠고
이스마엘의 나이는 대충 십육 세나 십칠 세 가량 되었겠지요.]

이삭에게 젖 떼기를 하는 날 아브라함이 큰 축하(祝賀)잔치를 베풀었습니다 (21:8).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삭의 모친)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들 (즉)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21:9)(개역개정) 보게되었습니다. [왜 창세기 기자는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의 아들"이라고
표현했을까?]


[4]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창세기 16장의 사건 후에 가려져 있었던) 아브라함의
가정 내부의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지난번에는 (몸종 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멸시했다는 것이 원인으로 언급되었는데) 이번에는 (종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을 "놀렸다"는 것이 사건의 도화선이 됩니다.
[도대체 이스마엘이 (이삭을) 어떻게 "놀렸다"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놀았다"
는 것인가? 이스마엘이 무엇을 했기에 사라가 이렇게도 “열을 받은” 것일까?]

[히브리 단어를 한번 꼼꼼히 들여다 보아야겠습니다] (우리말로) "놀렸다" (영어로는)
"playing (with)"라고 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와 문맥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찾아보니
히브리원문에는 누구를 놀렸는지 목적어가 없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
라고 (즉 이스마엘의 놀음의/놀림의 대상자로/목적어로) "이삭"을 뒤에 첨가한 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The Septuagint)에서 입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놀렸다"로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는 "웃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번역입니다. 즉 '이삭'이란 이름과 관계가 있습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이삭'과 관련해서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이 "웃었고" 사라도 "웃었고"  
(그가 태어나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웃었고" (이삭이 젖을 떼는 축하잔칫날에는)
이스마엘이 "웃었고" ... 시간의 흐름속에 사건마다 "웃음"이란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웃음"의 의미는 다를 수 있습니다. 믿기 어려워 웃는 웃음... 참으로
기가 막혀 웃는 웃음... 정말 기뻐서 웃는 웃음... 아니면 놀리거나 비웃거나 조롱을
하듯 웃는 웃음 등등... 이스마엘의 "웃음"은 어떤 웃음이었을까? 창세기 기자는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 각자에게 (이스마엘의) "웃음"의 해석을 맡기는 듯 합니다.

이스마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이삭을 위한) 잔칫날 이스마엘은 웃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고 있는) 대부분의 번역본은 이스마엘의 웃음을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번역하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살살
놀리고 조롱하며 (비)웃고 놀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보다도 (이스마엘에 대해)
훨씬 더 부정적인 유대 랍비들의 해석들도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히브리어 이름 ("이삭")과 연결하여 우리의 상상력을 펼치면 [이스마엘이 웃으며
놀았다]를 [이스마엘이 "이삭"하며 놀았다 (Ishmael is "Isaacing"]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마엘이 "이삭"인 척 하며 놀았다 라고 해석할 수 있는 거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해석들을 모아 정리를 해보면 (자기의 몸종인 하갈의 몸에서 태어
난)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이 (정실부인인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嫡子)출신의
"이삭"과 같은 신분인 듯이 행동하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사라는 무척 열을 받았고
화가 치밀었던 것같습니다.


[5]
(열을 받은) 사라가 (잔칫날 아주 기분이 좋은) 아브라함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발언을 합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당신의) 재산/유산을 나누어 상속 받지 못하리라" (창세기 21:10).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 보면 (여종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도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정실부인 자격으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했던 요구도 합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의 말을 곰곰히 짚어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이란 그들의 이름 대신에
"이 여종과 그 아들"이라고 지칭(指稱)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그들을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인격체로 보지 않고) "여종"과 "여종이 낳은 아이"라는 낮은 신분에 따라
그들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하는 사라의 언행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보았던 사건에서) 사라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자기의 몸종인)
하갈을 통하여 얻은 아이를 자기의 아들로 삼기 위해 아브라함에 먼저 제안을 했던
당사자(當事者)인데... 자기의 몸에서 이삭이란 아들이 태어났고 (이스마엘을 향한)
아브라함의 (아버지의) 심정을 눈치채고는 (십여 년 전에) 자기가 머리를 짜서 했던
제안에 대해 심히 후회를 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야겠다는 거룩한
동기보다는) 여종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에게 아브라함의 유산이 조금이라도
나누어질까 우려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동기로 "이스마엘"을 (하갈과 함께) 집에서
쫒아 내고자하는 (오래 품고있던) 속마음을 드디어 드러내는 듯합니다.


[6]
불현듯 성경에 기록된 "사라"에 대한 내용들중 나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초대 교회의 남녀 성도들에게 (특히) 여성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습니다: "아내들이여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 비록 (성경) 말씀을 아직 믿지 않는 남편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남편들은 여러분의 경건한 행실을 지켜
보고 감동을 받아 주님께로 오게 될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여러분은... 공들여 겉치장을 하지 말고/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가짐으로 속사람을 가꾸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 / 예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던 거룩한 여인들도
이와 같이 자기들의 속사람을 잘 가꿈으로써 자기의 남편들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사라를 보십시요.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기꺼이
순종하였습니다. 그러하니 여러분도 사라를 본받아 어떤 일을 겪더라도 조용히
착한 일을 행하면 여러분은 모두 사라의 딸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들은
이와 같이 아내를 대할 때 그녀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연약한 그릇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7).  

도무지 베드로 사도는 "사라"에 관해서 (우리가 성경에서는 보지 못한) 어떤 기록
들을 보았기에 사라에 대해서 이런 좋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라가 정말로
온유하고 조용하고 순종적이었을까? (사도) 베드로의 사라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아브라함이 들었다면 과연 동의를 할까? 어찌되었던 (내가) 창세기 16장과 21장
에서 본 사라의 언행과 베드로 사도의 평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평가한 것처럼 사라가 괜찮은 여성인데 (어쩌다) 창세기에 기록된
사건들에서는 (예외적으로) 사라의 부정적인 측면들만 주로 부각되어 사라 본인은
"너무 억울하다"라고 호소할 수도 있겠지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 보는 중에 나에게 깨달음이 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누구도 스스로 죄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구나.
감사하게도 성경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야곱과... 다윗과 같은) 주요한 인물들을
거룩하게 미화(美化)하지 않고 개개인의 모습과 언행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왜 필요한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구나.

바울 사도의 말씀이 내 귓전에 울리는 듯합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이런
일들이 기록된 것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잘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0:11).


[7]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대상에 대하여 선입관(先入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갈"이나
"이스마엘"이란 이름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일종의 부정적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도 분명히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선입관이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스마엘"을 위대한 선지자로 추앙하며 이슬람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마호메트(무함마드)의 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란 인물은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인물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
인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갈"이나 "이스마엘"이 등장하는 사건은 그 내용을 객관
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살펴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창세기 2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면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22: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을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을 향한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의 사랑에 대해
서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종인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도 많이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이스마엘에 대한 아브라함의 (아버지로서의) 기대와
사랑이 느껴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나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인데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고 오래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17:18). [유대 랍비들이 남겨 놓은 여러 자료에도 이스마엘을
향한 아브라함의 "아버지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사항입니다.]


[8]
(찬물을 끼얹는 듯한) 사라의 강력한 청원(請願)을 접수한 아브라함의 착잡한 심정을
(창세기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 낳은)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에 대하여 매우 근심이 되었더라 (괴로워 하였더라" (21:11)(개역개정).
그런데 "그 일에 대하여 매우 근심이 되었더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부분을 히브리
성경(원문)에서 찾아보니... (우리말과 영어로 직역하면) "그 일이 아브라함이 보기에
몹시 악하였더라 (The thing was exceedingly evil in the eyes of Abraham)"라고
적혀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건대 사라의 요구는 매우 악하고
의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잔뜩 화가 나있는 듯한 정실부인) 사라의 비위를 그대로
맞추어 주기에는 사라의 요구가 너무나도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보았던) (아브람-사래-하갈의) 불편한 삼각관계가 해소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불편한 관계에 이삭과 이스마엘까지 포함되어) 더욱 더 악화된 아브라함
가족들 간의 갈등은 과연 해결이 가능할까? 인간적으로는 해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결국 이 문제에 개입(介入)을 하십니다. 사라의 요구가 도를 지나
쳤다해도 결국 이 상황에서 (한 남자와 두 여인과 두 아들이) 한 지붕 밑에서 지내는
것은 더 심각한 갈등만 초래하게 될 것이란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신 듯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네게 요구하는대로 들어주라" (21:12)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염려하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운명과 장래 일은
(모든 것을 살피시고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이스마엘의 장래에 대해서는 "여종이 낳은 아들도 너의 자식이니 내가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21:13)고 말씀하심으로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을 다시 확인해주심으로 아브라함을 안심시키십니다. (창세기 17:20 참조)    


[9]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드디어)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母子)와 이별할
때가 왔습니다. 이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아마도 십육 세나 십칠 세로 추정 됩니다.
[참고로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 갈 때 그의 나이가 17세 정도였습니다
(창세기 37:2; 42:22 참조) [역시 참고로 창세기 12 장부터 21장까지 기록을 토대로
일부성경학자들은 하갈의 나이도 추정을 해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떡과 물을 담은 (염소)가죽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길을 떠나게
합니다. [참고로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애굽의) 여인들은 짐을
어깨에 메고 다녔고 (애굽의) 남성들은 짐을 머리에 얹어 (이고) 운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의 나이가 십대 중반이면 (자루에 담은)떡이나 (가죽부대에 담은)물
정도는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갈 수 있을터인데... 왜 아브라함은
하갈에게(만) 이것들을 메고 가게 했을까?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과 작별을 하고... 길을 떠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현재 중동지역의 지도를
보면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사이에 펼쳐져 있는) 브엘세바 지역의)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21:14). (며칠이 지났는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가죽부대에 담아왔던 물이 다 떨어지고... 이스마엘이 갈증에 허덕이다 거의 기절
한 듯합니다. 지쳐 쓰러지는 아들을 부축해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던 하갈은...
조금이나마 그늘이 있는 곳을 찾아... 결국 아이를 관목 덤불 아래에 누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고통스러워 하며 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
(관목덤불 아래 누워 있는) 아이에게서 멀찍히 떨어진 곳으로 가서... 하갈은 바닥에
주저 앉아 흐느끼며 울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화살 한 바탕 거리에 떨어져
앉아"(21:16)라고 기록했는데 활을 당겨 화살이 날아 갈 만한 거리는 대략 어느 정도
일까요?  참고로 유대랍비들의 주석들을 보면 "화살 한 바탕의 거리"가 나와 있는데
... 꽤나 먼 거리입니다.]


[10]
(우리들이 하갈의 슬피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God heard the voice of the lad)(21:17) 라고 창세기 기자는 기록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사람은 하갈인데 (21:16)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은 (쓰러져... 숨이 넘어가는 듯한...) 그 아이의 소리일까?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소리는 죽어 가는 아이의 고통스러워하는 숨소리 였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그 아이의 애절한 영혼의 신음 소리였을까?
혹시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역시 광야에서) 하갈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16:11)
하셨던 그 말씀과 복합적인 관계가 있을까?]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말씀을 전합니다: "하갈아 ... 하나님께서
저기 쓰러져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이제 일어나 아이를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21:17). [하나님의 천사가 이미 오래전에 광야에서
하갈에게 전해주었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16:10)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들려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갈을 눈을 (밝혀) 열어주십니다. 하갈이 눈에 샘이 보입니다.
[왜 지금까지는 그 샘이 하갈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까?] 하갈이 가서 샘에서 솟아
나는 맑은 생수(生水)를 가죽부대에 담아 와서 아이에게 마시게 합니다 (21:19).


[11]
성경에는 "눈이 감기다/눈을 가리우다" "눈이 열리다/밝아지다"라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나 습관적으로) 눈을 깜빡거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눈이 피곤해서 또는 묵상을 위해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눈을 뜨는 것
과도 분명히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감겨지고/가리워져" 있던 눈이 열리며 놀라운
일들을 보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여러 사람들의 체험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놀랍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수천여 년 전에) (죽음의 광야에서) 하갈의 눈이 밝히 열려 보았고 마셨던 샘물의
기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중한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의 인생과 신앙
여정에서 많은 경우에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들의 해결의 실마리는 멀리있지 않고
우리들 가까이에/주변에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없었던 샘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해 갑자기) 그 광야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물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던 하갈과 이스마엘이 그 샘을 보지 못했을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갈은 샘을 보았고 그 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서로에게 나누어 주고 베풀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사랑하고 그의 장래를 염려하였지만 그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마실 물 한 가죽부대만을 준비해주었습니다. (왜?) 그런데 갈증으로 인해 죽어가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한 모금이
아니라 목마를 때마다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샘물 가로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창조와 구원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던 (요한복음 1:14) 예수님께서는
영혼이 메마르고 지쳐있던 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가셔서 (야곱의 우물 가에서)
그 여인에게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 장 참조).


[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는) 날마다 묵상하는 생명의 성경말씀들 가운데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 성도님으로 부터 지난 주중에 안부글을 받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날마다
엄습하는 두려움 앞에서 움추려질때 [두란노강론]게시판에 올려지는 성경말씀과
묵상에 동참하는 형제자매들이 올리는 말씀묵상 나눔글들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음이 너무 감사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방이 봉쇄된 광야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체험했던 것처럼... 스스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自己)격리"를 해야만 했던 그 사마리아 여인이 체험했던 것처럼...
코로나 (COVID-19) 감염과 확산의 두려움에 갇혀 있는 우리의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의 샘에서]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묵상의 샘에서] 만질 수 있습니다.

오늘도 [다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다함없는 주의 사랑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네
다함없는 주의 사랑 비교할 수 없는 크신 사랑




(설교칼럼) 먹이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7) (요한복음 20)
(설교칼럼)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 (시편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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