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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이상태(2020-04-05 00:35:36, Hit : 430, Vote : 13
 (설교칼럼) 먹이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7) (요한복음 20)

주일예배 (2020/04/05)
가정예배 (강해설교요약)
=======================
본문성구: 열왕기상 17:1-16
설교주제: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


[배경]
오늘 함께 살펴보는 성경본문 열왕기상(列王記上) 사건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다윗 왕의
통치시대가 막을 내리고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登極) (열왕기상 1-2장 참조)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솔로몬 왕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열왕기상 11장 참조)의 사건들이 (열왕기상
전반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왕의 죽음 후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남쪽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는) 남유다 왕국(the southern kingdom of Judah)과 북쪽의
(열 개 지파로 이루어지는) 북이스라엘 왕국(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으로 분열이
(分裂)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2 장부터 16장까지) 남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왕국의 몇몇 왕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특히 (북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에 대해서 열왕기(列王記)
기자(記者)가 이와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는 이전의 왕들보다 훨씬 더 악을 행하였고...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 신을 숭배하기 시작하였고…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하고 바알을 위한 제단을 만들었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는데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보다 심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열왕기상 16:29-33 참조). [참고로 "사마리아"는 그 당시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리고 "아세라"는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하던 풍작(豊作)과 다산(多産)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세 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 사건은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합 왕을 찾아가면서 전개됩니다 (왕상 17:1-7 참조). 두 번째
사건은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선지자 엘리야가 (역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사르밧의 과부를 찾아갑니다 (왕상 17:8-16 참조). 세 번째 사건은 (두 번째 사건과 연관
되어 전개되는데)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입증(立證)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왕상 17:17-24 참조). [참고로 선지자 엘리야의 사역(使役)에 관한 이야기들은 열왕기상
17장부터 열왕기하 2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이번주일 (2020/04/05) 강해설교에서는 첫 번째 사건과 두 번째 사건을 함께 살펴봅니다.
(열왕기상 17장의 첫 번째 사건에) 홀연히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17:1). [엘리야가 등장할 당시에 북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하고 있던 인물이 바로 아합 왕
입니다.] (히브리어) "엘리야" ("Eliyahu" is Hebrew) ("Elias" is Latinized)는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 ("Yah is El") ("Yahweh is my God")이라는 뜻입니다. [사건 초반에 이미
"엘리야"라는 이름 자체가 ("바알"과 "아세라" 등의) 이방 신을 숭배하고 있던 아합 왕에게
"(오직)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라는 강한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그리고 후에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 850 여 명 간에 갈멜 산 위에서 펼쳐질
극적인 대결(對決) 즉 영적전쟁을 예고(豫告)합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警告) 하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앞으로 몇 년 동안
비 한 방울도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아니하리라"(왕상 17:1).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전하는 이 메시지는 아합 왕을 향해 던져졌지만 사실상 "바알" 신에 대한 도전장(挑戰狀)
입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폭풍의 신(storm god)" 또는 "날씨의 신(a weather god)"
으로 불리우며 비와 (풍요로운 수확을) 관장(管掌) 하는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경고한 것처럼 (오랜 기간 계속되는) 가뭄이 닥침으로
날씨와 비와 (풍요로운) 농사를 주관(主管)하는 진짜/참 신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사건은 신약성경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비록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가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무려 삼년 반 동안이나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서 5:17 참조).]


[2]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난 후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으라. 그리고 그 시냇
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 17:3-4). 그런데
구약성경 레위기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됩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까마귀는 “부정(不淨)한 동물” 즉 “정결(淨潔)하지 못한
조류(鳥類)”에 속합니다 (레위기 11:13-15 참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부정하고
불결(不潔)한 새를 통하여 (엘리야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게 하셨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나라에서도 까마귀는 예전부터 (불길한 일을 가져오는 새 즉)
흉조(兇鳥)로 알려졌습니다. [한편 까치는 "반가운 손님"으로 좋은 일을 알려주는 길조
(吉鳥)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언젠가 흥미롭게 보았던 뉴스 보도 표제
기사가 생각납니다: "정전 주범 배설물 테러... 현상수배 걸린 까치와 까마귀..." 보도에
따르면 (최근에는) "까치"와 "까마귀" 둘다 유해(有害) 조류로 지정이 되어 있고 사냥군
들이 포획(捕獲)을 해오면 한 마리당 (몇 천 원 씩의) 보상금까지 주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까치"들이 전신주 위나 통신 중계설비 위에 집을 지어 합선과 정전과 통신
두절 사태가 많이 일어나고 농촌 지역에서도 "까치"들이 비닐 하우스를 콕콕 찔러 훼손
하고 농작물을 쪼아 먹어 많은 피해를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까마귀"는 더 문제거리
라고 합니다. 특히 (낮에 논밭에서 먹이 활동을 마친) "까마귀" 떼가 저녁무렵에 도심지
(都心地)에 나타나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으면 길을 가던 사람들이 손과 비닐로 머리를
가리고 심지어 우산도 꺼내 씁니다. 까마귀의 배설물이 공중에서 비오듯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온 거리에 까마귀 배설물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어떤 거리에는 까마귀에
대한 경고 현수막도 걸려 있습니다. [이곳 블루밍턴에서도 이따금씩 겪는 일입니다.]  

이렇게 문제거리인 "까마귀"에 대해 나의 궁금증이 다시 발동(發動)합니다: "하나님
께서는 왜 이런 까마귀들에게 (엘리야를 위해) 일용할 양식을 날라다 주는 택배(宅配)
(서비스)사업을 맡기셨을까?" 그런데 불현듯 내 눈 앞에 베드로의 모습이 보입니다...
베드로가 정오 무렵 기도하러 (집의) 옥상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가 환상을 봅니다.
환상중에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땅으로 내려 옵니다... 그 보자기 안에
새들과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 (사도행전
10:9-16 참조) [베드로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나에게 무언가 감(感)이 옵니다.
비로소 "까마귀"들의 택배사역(宅配使役)에 대해 감(感)이 잡히는 듯합니다.]


[3]
(마치 이상의 소설 "날개"와 같이 펼쳐지던) 나의 의식의 흐름에서 (오늘의) 성경본문
말씀으로 다시 돌아와서 "까마귀"에 대한 나의 여러 생각 조각들을 모아 정리합니다.  
(내가 살펴 보았던 자료들에 따르면) 까마귀는 다른 새들에 비해 지능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2002 년도에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교) 조류학자들이 (서남태평양의 뉴칼레
도니아 섬에서 잡은) 까마귀 한쌍을 관찰하며 실험을 했는데 이 까마귀들은 (인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지능이 높은 동물로 알려져 있는) 침팬지에 견줄 만큼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심지어 도구를 사용할 수도 있을 정도였고 더욱이 인과관계(因果關係)
(원인과 결과)를 유추할 수 있는 추상적 인지 능력(認知能力)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홍수 사건 때 (홍수가 끝난 후) 노아가 방주
밖에 물이 얼마나 줄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까마귀를 내보냈는데 (창세기
8장 참조) 이때 노아는 까마귀의 지능이 다른 새들 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나의 갖가지 추론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엘리야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아합 왕의 노여움을 피하여) 그릿 시냇가로 가서 지내게 되고... 그에게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그리고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열왕기상
17:5-6 참조).  문득 시편에서 묵상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마땅하도다...
여호와께서... 울어 대는 까마귀 새끼에게도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편 147: 참조).
그리고 연이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
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아니하냐" (누가복음 12:24 참조).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까마귀... 시편에 등장하는 까마귀... 열왕기상에 등장하는
까마귀... 주욱 이어지는 것이 마치 까마귀들의 족보(族譜)를 들여다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까마귀들은 새끼때부터 자기들을 먹이시고 길러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는가보다... 그리고 성장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떡과 고기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날라다 주는 택배(宅配)
일을 맡아하는가보다... 오늘 집 앞에 있는 우편함에는 까마귀들이 (내게 필요한)
어떤 것들을 가져다 줄까?]


[4]
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드디어 그릿 시내도 말라버립니다 (17:7). 그러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열왕기상 17:9 참조). "사르밧 (Zarephath)"이라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에 있었던 페니키아의 주요 도시 국가인) "시돈 (Sidon)"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돈"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태어나서 자랐던 곳이고 (이 사건 당시)
시돈의 왕은 (이세벨의 아버지인) "엣바알 (Eth-baal)"입니다 (왕상 16:31 참조).  

특히 "시돈"은 (그당시) "바알" 신 숭배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Sidon was
the heartland of Baal worship.) 그러므로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시돈의 사르밧"은 엘리야에게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 적진(敵陣)에 해당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렇게 적진(敵陣) 깊숙이 보내셨을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바알"은 가짜 신이요 우상일 따름이고)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실려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선지자 엘리야의 모국(母國)인 이스라엘에서는 (아합 왕과 이세벨이)
그를 잡아 죽일려고 하는데...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 시돈의 사르밧 이란 곳
에는 엘리야를 살려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구원사(救援史)의 큰 틀에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이방 사르밧 땅으로 파송(派送)되는 것은 앞으로 역사에서 점진적으로 펼쳐지게될
그리고 때가 차면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도(使徒)(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
들을 통하여... 복음이 이방 땅으로 널리 퍼지는 전조(前兆)가 아닐까?]


[5]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엘리야가 상당히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을
것같습니다. "내가 그 곳에 살고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
느니라" (열왕기상 17:9 참조).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그 과부에게 명령을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직접 과부에게 말로서 명령을 내리신 것일까? 아니면 미리
(그 과부를) 엘리야를 위하여 "보시고 예비해 놓으셨다"는 표현인가... 마치 모리아
산에서 (미리 한 마리 숫양을) 아브라함을 위하여 "보시고 예비"해 놓으셨던 것처럼
(창세기 22:13-14 참조) "미리 보시고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 (Jehovah Jireh)"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신다는 표현일까? ]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많이 언급되는 "취약계층(脆弱階層)"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구약과
신약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그 시대에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들로
여겨졌던 취약계층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였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고 명령하신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나그네나 고아를 억울하게 하지 말고 과부의 겉옷을
저당 잡지 말라... 너희는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의 몫으로
남겨 두라...  포도원에서 포도를 수확할 때도 다 따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신명기 22장 참조)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도 "과부"들을 위한
구제사업과 구호대책들이 마련되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참조).  
[참고로 "나그네"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한국에 와서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겠지요.]

(계속되는 가뭄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부족한데... 그들중에 엘리야
에게 먹을 음식을 나누어 줄 자선가 (慈善家)가 (사회의 가장 취약계층에 속하는)
"과부"라는 것이 역설적(逆說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가난하고 굶주린 "과부"
에게 엘리야를 먹여 살리는 일을 맡기실까?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이런 반전(反轉)을 도모(圖謀)하실까?]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엘리야는 "어떻게 과부가 나를 먹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 레위기에서 배운 상식(常識) 으로는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이미 (부정한 새) "까마귀”를 통하여 일용할 양식을
공급 받은 경험이 있는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부정한) 이방 땅 과부를
통해 나를 먹이시려는가 보다"라는 구원의 역설적 진리를 깨닫지 않았을까?]


[6]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시돈 지역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엘리야가
그때까지 까마귀들과 만나며 머물러 있던 "요단 앞 그릿 시냇가" 에서 (시돈 지역의)
사르밧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라고 합니다.] 드디어 엘리야가 "사르밧"에 도착했는데
(감사하게도) 성문 어구에서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왕상 17:10 참조).

[그 여인이 과부인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 당시 과부들은 (의미는 다르지만 "주홍
글씨"와 같은) 어떤 표식을 달고 다녔을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너에게
말했던 그 과부가 바로 이 여인이다"라고 말씀으로 알려주셨을까?]  참고로 (음식을
조리하거나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불을 때는데 필요한 "나뭇가지를 줍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계 여러 곳에서 (특히 저개발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
특히 여성이나 아이들이 하는 일상의 중요한 활동이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여인을 불러 부탁을 합니다: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왕상 17:10 참조). 극심한 가뭄 상황에서 물 한 그릇을 달라는 것은
[물론 나그네를 대접하는 고대근동사회의 관습 (Law of Hospitality)이 있긴 했지만]
쉽지는 않은 요구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두말없이 그 요구를 들어 줍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좀더 (뻔뻔스러운) 말을 합니다: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 17:11 참조)... 불현듯 아주 예전에 한국에서 이따금씩 듣곤했었던
"문디 콧구멍에서 마늘을 빼물라카나"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뻔뻔"과 관련되는
독특한 경상도 사투리 표현인데 아마도 지금은 비속어(卑俗語) 내지 금기어(禁忌語)
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과부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엘리야가 이렇게 뻔뻔하고 강도(强度) 높은 요청으로
시험해 보는 것일까?]


[7]
선지자 엘리야의 ("도를 넘어섰다"는 세인의 비판을 받은 만한) 요청에 그 여인이
응답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들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왕상 17:12 참조).
[이스라엘 지역에서 일어난 가뭄과 그로인해 이어지는 흉년은 이 과부가 살고 있는
사르밧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합니다. 해안을 따라서 어업과 해운업이
발달 했던 시돈 지역은 농업 곡물류 식량(食糧)과 양식(糧食)은 주로 이스라엘에서
수입을 했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2:20 참조)]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라는 말에서 이 과부는 자기에게 이런
과도(過度)한 요청을 하고 있는 낯선  나그네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지(認知)하고
있는 듯합니다. [엘리야의 얼굴 생김새 아니면 말투 아니면 옷차림으로 보아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았을까? 그리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에서 이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합니다. [한편으로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라는 말속에
남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엘리야는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미리 예비하신 그 과부로구나"하는 확신을 얻었을까?]  


[8]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7:12)는 과부의 말을 들었을 때 엘리야의
얼굴 표정이 어떠했을까 한번 그려봅니다. ("이 과부가 나를 먹여 살려 주게끔 하나님
께서 미리 계획을 세우셨는데... 죽으면 어떡허나")  즉시 엘리야가 과부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아예 다시는 못하게 말리듯이)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7:13). [이 말을 듣는 순간 과부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과부는 엘리야의 말속에서 어떤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느꼈을까?

선지자 엘리야가 과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강조하는데... 무엇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일까? (지난 주일에 우리가 살펴 보았던 성경말씀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던 "하갈"에게도 여호와의 사자가 "두려워하지 말라" (창세기 21:17)라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엘리야는 "먼저 나를 위해 떡을 만들어 가져오라"라고 (방금 자기가 했던 다소 도가
지나친) 요청의 근거를 과부에게 말해줍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왕상 17:14 참조).

이제부터 모든 관심은 과부의 응답에 집중됩니다. "과부가 엘리야가 하는 말을 믿고
순종하느냐 못하느냐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존재와 능력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이에 대한 응답에 이 사건의 결말(結末)이 달려 있습니다. 결국 사건의
핵심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체험했던)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물과 떡을 달라"했던 요청(要請)의 요지(要旨)는
"믿음의 도약 (Leap of Faith)"입니다.


[9]
신학자들의 해설에 따르면 "믿음의 도약(跳躍)(Leap of Faith)"은 (일반적인 인간의
차원에서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을 인간이 믿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이성적인
논리와 판단을 뛰어넘는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무언가 역설적인 것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한번도
[인격적으로] 체험해 보지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도약"은
크나 큰 도전(挑戰)입니다. "믿음의 도약"을 곰곰히 묵상하는 중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참조). 의심하던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24-29 참조)

"믿음의 도약"을 논할 때 사람들은 흔히 [키에르케고르]라는 이름을 언급하곤 합니다.
덴마크 출신의 키에르케고르 (Soren Kierkegaard)는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사상사(基督敎思想史)에서는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믿음의 도약"이란 의미로 키에르케고르가 사용한 용어는 "Qualitative Leap"
(즉 어떤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 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설명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이고 또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지만 ("There is an infinite qualitative gulf between the finite man and the
infinite God")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실존적 삶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한 우리 인간은 (삶의 고난과 고통속에서) 어떤 결정적인 단계
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도약을 해야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도약 (Leap of Faith)"입니다.

물론 "믿음의 도약"에는 언제나 큰 위험이 따릅니다. 과연 내가 믿음으로 도약하려는데
그 대상이 (진실로 성경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
나신) "여호와" 하나님인가... 아니면 ("바알"과 같은 실체가 없는 헛된) 우상인가에 대한
분별력(分別力)이 필요합니다.  

구원(救援)과 영생(永生) (영원한 생명)은 우리 인간이 "믿음의 도약"을 통하여 하나님
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적인 만남은 인간이 겪는
"위기(危機)상황" 또는 인간이 부딪치는 "한계(限界)상황"에서 주로 이루어집니다. 이번
주일 강해설교의 본문이 되는 성경의 사건들은 이러한 "위기상황/한계상황" 가운데 펼쳐
지는 "위기 신학"(Crisis Theology)에 해당합니다. 즉 인간들이 "위기상황"에서 비로소
스스로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를 찾아 도약하는
역사적 사례(事例)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
열왕기 기자는 이 사건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과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
하니라" (왕상 17:15-16 참조). 결국 사르밧 과부의 "믿음의 도약"은 (엘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을 낳고 (과부와 아들이 죽음을 앞두고 먹었을)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은 (엘리야와 과부와 아들이 오랫동안 함께 떡을 떼는)
"축복의 만찬(the Blessed Eucharist/Thanksgiving)"으로 바뀌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이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0:41-42 참조)

주일예배를 준비하면서 한주간 동안에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성경본문 (열왕기상 17/
열왕기하 7/ 요한복음 6/ 빌립보서 4) 말씀을 다시 살펴보면서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엘리야와 사르밧의 과부와 네 명의 나병환자가 겪은 것과 같은
어려움과 근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려본 경험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임하심을 체험해 보았습니까?


[11]
미국과 독일과 한국 등 전세계 많은 국가들이 코로나-19 로 인하여 발생한 초비상
사태에 직면하여 "긴급재난보조금" "긴급 생계자금" 등 엄청난 규모의 구호대책과
경기부양 대책들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1930 년대에 있었던 세계적인 경제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이 생각납니다. (대공황을 배경으로)... 미국의 문학작가 죤
스타인 벡의 작품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가 생각납니다...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시행했던 대규모 "뉴-딜" (New Deal) 정책이 생각납니다. 급격한
생산과 소득의 감소와 실업률 급증의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던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의 대규모 "적자 재정" 정책이론도 생각납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이미 시작되고 있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 대응해서 각국
정부의 지도자들이 (당면한 위기상황을 잘 판단하고) 시기에 적절한 정책을 세우고
집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특히
코로나-19와의 치열한 전쟁 최일선(最一線)에서 방역(防役)과 환자 치료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의료진(醫療陣)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살펴본 성경의 사건들속에서 우리는 (전쟁과 가뭄으로 인한) 실물(實物)경제의
붕괴를 보았습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같은 취약계층이 고통을 받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한 과부가 통에 남은 가루를 긁어모아
나그네에게 떡을 만들어 주고... 한 아이가 자기가 먹을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배고픈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어놓고... 빌립보 지역에 살고 있던 가난한 성도
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조금씩 모은 성금을 바울 사도에게 보내어 주고... 그로
인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남을 보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의 성도들
에게 했던 말처럼) "모든 사람들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놀라운 역설적 방법으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통하여 놀랍게 역사하심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12]
얼마전에 우리 교회 홈페이지의 [두란노강론] 게시판에 올려졌던 묵상나눔글이 다시
생각납니다. 한 중고등부 학생이 올린 글인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우리 집에 화장지
(toilet paper)가 다 떨어져서 Kroger에 혹시나 화장지가 있을까 해서 갔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화장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클리넥스 (Kleenex)
(paper tissue) 여섯 통이 있었습니다. 클리넥스라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 여섯 개를
모두 카트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희가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땅에 떨어진 이삭도 줍지말라 너희가
또 포도원에서 수확할 때에 포도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땅에 떨어진 포도 열매는 줍지
말라 이것들을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하여 그대로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19:9-10). 그래서 (물건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클리넥스
박스 몇 개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 가족들
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에 소개한 묵상나눔글의 내용과 같이 우리가 오늘 살펴본 성경말씀이
성도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결심과 행동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지극히 작은 자"에 속하는 과부와 아이의 작은
나눔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중요한 톱니바퀴의 역할을 합니다."

어린 장애인이 마스크와 소액의 성금을 경찰서 앞에 몰래 가져다 놓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할아버지가 리어커에 여러가지 생필품을 챙겨 가져다 놓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오랫동안 모은 성금을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가져옵니다...  
이러한 작은 나눔들은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아름다운 향기요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실 예물입니다."  


[축도]
이제는 신령과 진정으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보낸 기도문으로)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량없이 풍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 가운데서
성도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설교칼럼) 살리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7) (살전 4)
(설교칼럼) 돌보시는 하나님 (창세기 21) (요한복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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