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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이상태(2020-04-12 00:35:48, Hit : 436, Vote : 12
 (설교칼럼) 살리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7) (살전 4)

주일예배 (2020/04/12)
가정예배 (강해설교요약)
=======================
본문성구: 열왕기상 17:17-24
설교주제: 우리을 살리시는 하나님


[1]
2020년 (4월 12일) 부활주일에 성도님들과 함께 나눌 말씀을 준비하며 깊은 생각과 시름에
잠기곤 합니다. [기독교 성도들이 전통적으로 지키는 "종려주일(Palm Sunday)"부터 시작
되는 "고난주간(Passion Week)" 내내 우리들은 전세계에서... 특히 미국내에서 (종교적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고난"(heart-aching pain and suffering)의 주간을 알리는 침울한
소식들을 듣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종려주일 시작 하루전인 4월 4일에) "미국이 치명적 시기, 참혹한 시기에
진입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주와 다음 주 사이가 우리 모두에게가장 힘든 주가 될 것이다"
라고 밝혔습니다.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보건원 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의 소장도
"아주 심각한 한주가 될 것이다... 미국은 현재까지 코로나(COVID-19)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가 통제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4월
5일 종려주일에는) 제롬 애덤스 공중보건서비스단 단장이 '폭스뉴스선데이 (FOX News
Sunday)’'에 출연해 "다가오는 한 주는 삶에서 가장 힘들고 슬픈 주가 될 것이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진주만 피습과 2001년 9/11 테러사태와 같은 순간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020년) 부활주일에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은 "부활(Resurrection)"이란 단어가 매우 생소
(生疏)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우리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침울한 상황입니다.  뉴스 보도를 통해 날마다 집계(集計)되는 코로나19 감염
확진자들과 사망자들의 수가 전해집니다.  대형냉동차(冷凍車)로 옮겨지고 있는 수많은
시신(屍身)들... 어딘가 매장지(埋葬地)를 향해 가는 군용트럭들의 긴 행렬... 굴착기로
길다랗게 땅을 파서 만든 임시 공동 매장지 안에 줄지어 누여 있는 관(棺)들... 날마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세계 곳곳의 광경입니다. 장례(葬禮) 조차 제대로 치를 수가
없는 상황에서 유족들의 슬픔은 너무나도 큽니다. [과연 2020년 부활주일에는... 예전에
"부활주일"을 맞이할 때면 느끼곤 했었던 ... 그런 감격이 있을까?]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현장을 기록한 복음서 말씀들을 차례로 떠올려봅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첫날 매우 일찍이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의 시신(屍身)이 누여져 있는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무덤 안에서 뜻밖에도 흰
옷을 입은 천사가 전하는 말을 듣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6 참조)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는 여인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라" (마가복음 16:8 참조).  
[우리가 상상했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반응들
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이 부활의 역사적 현장에서 실제로 나타났던 반응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2020년 부활주일에는 (예전에) 대부분 성도들이 부활
주일을 맞이했을 때 보여주었던 (다소) 피상적(皮相的)이고 습관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이 전해졌던 역사적 현장을 좀더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살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감사한 것은) 한 주간 부활주일 강해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의 새벽과 낮과 저녁 시간속으로 걸어 들어가 역사의
현장들을 (성경을 통하여)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나의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 "너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 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께서 친히 오사 너희를 일으키시리라 하라" (이사야 35:3-4 참조).


[3]
지난주일 (2020/04/05) 우리는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까마귀로
부터 떡과 고기를 공급받고 또 사르밧 과부로 부터 일용할 양식을 공급 받는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 (제1부와 제2부는) "행복한 결론(Happy Ending)"으로 막을 내리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주일 (2020/04/12) 제3부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급변(急變)합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왕상17:17 참조). [과부의 아들이 어떤 병에 걸렸을까... 호흡기 질환(疾患)이었을까...
아이의 발열 증상이 나타나자 과부가 곧 엘리야에게 진단 검사를 의뢰했을까... 아이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과부가 (비상 인공호흡기를 찾듯이) 엘리야에게 (하나님께 긴급이
재난 중보기도를 하여 아이를 낫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을 했을까...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야고보서 5:14-16 참조)라고 사도 야고보가
선지자 엘리야의 이름을 언급하며 "중보기도"에 대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권면(勸勉)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코로나19 감염 확진 판정을 받고 병원에 옮겨져 투병(鬪病)중에 증세가 심히 위중해져
숨이 끊어지는 사람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를 날마다 접하면서 생각합니다...
확진 환자들의 가족들 중에는 (사도 야고보가 권면했던 것처럼) 치유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면 그들의 심정이 어떠할까... 만일 기독교 성도들이라면 그들의 신앙(信仰)은
이런 일로 인해 시험받지 않을까...

그런데 지난주일 설교내용중에 언급했었던 덴마크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가
생각납니다. 그가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이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했던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게 됨으로 빠져들게 되는) 절망(絶望)에
관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인간의 육체의 질병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에게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인간들이
두려워해야 할 죽음에 이르는 병은 영혼의 질병 즉 절망이란 병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닌가...]


[4]
아이의 죽음 앞에서... 사르밧 과부가 마음속에 담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엘리야에게
토해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
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왕상 17:18 참조) (개역개정).
과부의 이 말은 우리가 곰곰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O man
of God)라는 호칭(呼稱)은 (두 번째 사건을 통하여 그리고 그후) 엘리야의 말과 행동과
사역을 지켜 보는 가운데 과부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지(認知)와 믿음의 성장을
암시(暗示)합니다.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直譯)하면 "무엇/ 나에게/ 당신에게 (What/ to me/ to you)"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사건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예를 들자면 (따지는 어투로) "당신이 도대체 나와 무슨 원수 진 일이 있기에 (이렇게
나를 괴롭히려 왔나이까)" (사사기 11:12 참조) 또는 (빈정대는 어투로) "나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 찾아왔나이까" (열왕기하 3:13 참조) 등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편으로는
(호소하는 어투로) 절망적인 심정을 토로(吐露)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들도
이따금 답답한 일이 있거나 억한 심정을 표출하고 싶을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도 유사한 표현들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과부가 "여호와 하나님과 엘리야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상당히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상이 아닌 진짜 "신"이신) 여호와께서 보내신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집에
와서 머물게 되면서부터 (이전까지는) 자기를 세심히 살펴보지 않으시던 하나님께서
자기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시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자기의 죄가 낱낱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하나님께 또렷이 기억되었고... 따라서 (자기가 지었던 죄에 대한
심판과 처벌로) 자기 아들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셨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입니다. [과부의 이 말은 "죄와 벌"의 상관관계(相關關係)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견해를 보여줍니다.]

같은 맥락(脈絡)에서 성경에 기록된 여러 말들이 생각납니다... 욥의 친구들이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고통 받고 있던)
욥을 향해 말했습니다: "잘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사람이 누구인가 정직한 자가
끊어짐이 어디 있었던가" (욥기 4:7 참조)... (어느날 길을 가다가) 태어 날 때부터 맹인
(盲人)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 나게
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 죄 때문이니이까 아니면 그의 부모 죄니이까"
(요한복음 9:2 참조)

다른 한편으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베드로는 (기뻐하기 보다 오히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떨리는 음성으로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Depart from me, for I am a sinful man, O Lord") (누가복음 5:8 참조). [사르밧의
한 과부가 그리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가 각각 (다른 상황에서) 표출한 마음의
고백의 공통점은 "나는 죄인"이라는 깊은 깨달음과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
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독일의 비교종교 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의 저서
(著書) <성(聖)스러움의 의미(意味) (The Idea of the Holy)>가 생각납니다.]

[의식의 흐름 속에서... 나는 루돌프 오토를 따라 지중해 주변의 한 도시에 위치하고
있는 유서 깊은 유대인 회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기도 소리를 듣는
중에 묘한 체험을 합니다... 나의 영혼에 전해지는 "성스럽다"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나의 의식의 흐름이 다시 누가복음으로 이어져갑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 땅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 엘리야가 그 중 어느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사르밧)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느니라" (누가복음 4:16-30 참조)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의 의식의 흐름속에서...)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의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누가복음 4:31-37 참조)...

나의 의식은 게네사렛 호숫가 (갈릴리 바닷가)로 흘러 가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아뢰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여 주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멀리 어디선가 바울의 음성도 들려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누가/무엇이 베드로를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건져낼까... 누가/무엇이 바울을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낼까... 누가/무엇이 나를/우리를 이 깊은 절망에서 건져낼까...]

(부활의 그날) 새벽에 무덤으로 찾아 가는 여인들과 함께 그 답을 찾습니다.
(부활의 그날) 오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와 함께 그 답을 찾습니다.
(부활의 그날) 저녁에 문을 굳게 잠그고 앉아 있는 제자들과 함께 그 답을 찾습니다.


[5]
사르밧 과부의 (고뇌와 원망과 참회가 뒤섞인 듯한) 울먹임을 듣고 엘리야는 과부의
품에서 (이미 숨이 끊어진) 아이를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침상(寢牀)에 아이를 누입니다 (왕상 17:19 참조). 그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정녕 내가 머물고 있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과부의
아들을 죽게 하셨나이까?" (왕상 17:20 참조) [이렇게 부르짖음으로 기도 하는 엘리야의
복잡한 심정을 가늠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

(비판적인 시각에서) (열왕기상 전체를 배경으로) 엘리야의 언행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돌보심을 매순간 체험하면서도) 엘리야가 부르짖는 이 기도에는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원망과 푸념이 담겨 있는 듯 합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내가 지금까지
말없이 순종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큰 고비를 넘기면 더 큰 고비가 닥쳐옵니까... 도대체
언제쯤 나의 이런 도피(逃避)생활이 끝이 납니까... 내가 왜 사람들에게 이렇게 민폐(民弊)
를 끼치는 존재가 되어야합니까?"  

한편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의 기도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이 여인은 과부입니다... 이제 아들마저 잃게되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앞으로 살아 갈 도리가 없습니다... 이 여인은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지금까지 나를 지극
정성(至極精誠)으로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나를 돌보고 있는 이 과부
에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 널리 알려지면 (바알과 같은 우상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니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수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한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니 이 불쌍한 과부에게 내리신 이 재앙을 제발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관한 말씀을 생각합니다 (출애굽기 34:5-7 참조)]

[아이의 나이가 몇 살 쯤 되었을까... 다락방은 어떤 것이었을까... (청년부 형제 자매들이)
묵상나눔글 가운데 올린 여러 의문점들에 대해서는... 언젠가 우리가 다시 함께 모여 예배
드릴 수 있을 때... 금요강론시간을 통해 나눌까 생각합니다.]


[6]
엘리야가 (숨이 끊어진) 아이 위에 자기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왕상 17:21 참조) 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다고 (열왕기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들과 구약성경 학자
들의 히브리성경 원문의 해석들을 보면 엘리야는 아이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리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또) "몸을 펴서 엎드리고... 기도하고..." (또) "몸을 펴서 엎드리고
기도하고..." (이렇게) 엎드리고 기도하는 동작을 세 차례 반복한 듯합니다.]

[두란노강론] 게시판에 성도님들이 올린 묵상나눔글들을 읽어 보니 "엘리야가 왜 [세 번]을
이렇게 했을까?" 라고 "세 번" 이라는 횟수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이 많은 듯 합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에서] "삼(3)"이라는 숫자를 기독교의 핵심교리들 중 하나인 "삼위일체
(三位一體)"와 연관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구역성경 속에 "세 번"
이란 반복 횟수가 많이 나오는 것을 사실입니다. [일단 여기서 구체적인 사례를 생략합니다.
성도님들께서 성경책을 펴고... 기억이 나는대로 "세 번"이라는 횟수가 언급되는 성경본문
들을 찾아서 각자 나름대로의 의견/해석들을 나누어 보세요.]

그의 기도에서 엘리야는 "아이의 혼이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17:21)라고 "혼(魂)"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문득 창세기의 한 사건이 생각납니다. (야곱의 아내요 요셉의 모친인)
라헬이 (둘째 아들을)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다 난산(難産)으로 결국 "그의 혼이 떠나고"
(사망하여)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야곱이 라헬의 시신을 묻었습니다 (창세기 35:16-20 참조).
엘리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아니하면...  조만간 과부와 엘리야가 아이의 시신을
땅에 묻어야 합니다. [참고로 영(靈)과 혼(魂)과 육(肉) 또한 영혼(靈魂)과 육체(肉體)의 구분
등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와 해석은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로 부터...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있는데
(열왕기상의 이 사건 이전에는) 사람의 "혼"이 떠나려 할 때나 "숨"이 끊어졌을 때 가족이나
누군가가 ("혼이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혼이 몸에 다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엘리야
같이 그렇게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는 듯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참조)라고 (아담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그 말씀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것
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날 수도 있다"는 소생(蘇生)부활(復活)의
개념 자체가 이전 사람들에게는 없었을까... 그래서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히브리서 9:27)고 했을까?

(구약성경에서) 인간에게서 떠난 "혼"이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는 엘리야의 기도가
처음인 듯합니다. 어떻게 엘리야는 (이전에도 없었고... 선지자로서의 사역에서도 한번도
스스로 경험해 보지도 못했고... 간구해 본적도 없었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소생
이나 부활의 개념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을까?  (아이의 죽음을 직면하는 순간에)
엘리야 스스로 지금까지 체험했고 차곡차곡 쌓여진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드디어 (인간이 살아왔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부활"이 가능한 차원(次元)으로의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을 할 수 있었던가...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 사이에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오게될 예언자로) 엘리야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도 엘리야를 그런 인물로 중요하게 언급하신 것일까...


[7]
(열왕기 기자가 기록한) 엘리야의 기도 내용에 따르면 아이의 "혼"이 분명히 아이의 몸을
떠났습니다. "혼이 떠났다"는 표현과 "숨이 끊어졌다"(17:17) 표현은 동일한 것으로 여겨
집니다. 내가 루이빌 대학병원(University of Louisville Hospital)에서 병원목회(hospital-
medical chaplaincy) 실습을 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병원의 중환자실(ICU) (Intensive
Care Unit)에서 내가 여러번 보았던 것은... 위독한 환자가 마지막 숨을 몰아 쉬고... 곧
담당의사가 와서... 환자의 사망을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일전에 [목회자 칼럼]에서도
언급했던 적이 있는데... (아주 오래전에 한국에서) 내가 위중한 수술을 받고 회복실 겸
중환자실로 옮겨져... 긴 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 즈음에... 나의 병상과 가림막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 병상에 있던 (어린 여학생) 환자가 갑자기 가쁘게 숨을 몰아
쉬고... 잠시후 달려온 의사가 환자의 언니와 오빠 앞에서 그 여학생의사망을 선언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면 의사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 숨쉬던 사람이 "죽었다"고 선언을 할까? 세계보건
기구(WHO)에서는 "사망은 소생(蘇生)할 수 없는 삶의 영원한 종말"이라고 규정(規定)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심장이 멈추고... 뇌로 공급되던 피의 흐름이 멈추고... 이어 뇌의
활동이 멈추면서 (뇌의 활동을 측정하는 의료기기의 스크린에서) 뇌파(腦波)가 사라지면
결국 (살아있던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것일까요? 심장박동 등 중요한 신체 일부의 기능이
멈추어도 다시 소생(蘇生)할 수 있는 (몇 분정도의) 한계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 한계
시간이 경과하면 산소의 결핍으로 인해 뇌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고 육체의 조직들이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임상적(臨床的) 죽음의 한계순간을 넘어 생물학적(生物學的)
죽음 즉 궁극적인 죽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심장박동 정지와 호흡 정지와 동공확대와 광반사 소실 등등의
현상이 나타나면 의사들이 사망으로 선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학 기술과
의료기기(醫療機器)의 발달로 인하여... 특히 요즈음 코로나(COVID-19) 확진 환자들의
치료와 관련하여 뉴스 보도에 많이 언급되고 있는 인공호흡기(人工呼吸器) (Ventilator)
등이 활용되면서 심장박동 정지나 호흡의 정지가 사망의 최종판단 기준이 될 수 없게
되었고... 결국은 뇌파(腦波)가 사라지고 (인간의) 의식(意識)이 없어지는 뇌사(腦死)의
상태를 "인간의 죽음"으로 규정/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완전한
죽음이란 심장과 폐와 뇌의 기능이 사라지는 것 뿐만 아니라 몸 전체의 세포가 사멸하는
것으로서 결국 인간의 죽음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시간 내지는 수 일간에 걸쳐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기초적인 의학(醫學) 지식은 "혼이 떠나고... 혼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고" 등의
표현이 나오는 죽음과 소생(疏生)/부활(復活)과 관련된 성경속의 사건들을 우리가 살펴
볼 때 참고사항으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기적(奇迹)에 해당하는
사건들 특히 부활과 관계되는 사건들을 우리가 이해하고 깨닫는데 있어서는 (지난주일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가 있던) "믿음의 도약" (Qualitative Leap) (Leap of Faith) 즉 우리
인간이 일반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합니다.


[8]
열왕기 기자는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왕상 17:22 참조)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성경말씀과 장면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니라" (창세기 2:7 참조).

그리고 열왕기 기자는 사건의 결말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왕상 17:23-24 참조).

지난주일에 살펴보았던 사건들로부터 이번주일에 살펴보는 사건 속에서 사르밧 과부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점진적인 변화를 우리는 감지(感知)할 수 있습니다.
과부가 처음 엘리야를 만났을 때 "여호와"라는 신(神)의 존재는 과부 자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엘리야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왕상 17:12 참조). 그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
지지 아니하는 기적을 날마다 경험하면서 이 과부는 (엘리야의)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도
직접 관여하시는 (우상이 아니고 참 신이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숨이 끊어졌던 아이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며 이제부터 과부에게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실(眞實)"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르밧 과부는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眞理) 그 자체이시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되었습니다. 자칫 바닥으로
추락(墜落)할 뻔했던 과부의 "믿음의 도약(跳躍)이 드디어 올바른 신앙궤도에 진입(進入)
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의 의식의 흐름속에)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납니다 (요한복음 4장 참조).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게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신선함이 느껴집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요한복음 14:6 참조)
라고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다른 제자들이 전해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쁘고도
놀라운) 소식을 도무지 믿지 못하겠노라고 하던) 제자 도마(aka "Doubting Thomas")가
한주간이 지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을 때 했던 그 고백이 생각납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참조). 이어 예수님의
음성이 내 귓전에 울리는 듯합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29 참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모두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된 자들"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틀어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기적(奇跡)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사건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열 개의]
사건들 모두가 (무언가를 가리키는) 표지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신약성경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친히)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사건들은 (동기와 전개 과정과 결말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향하여 나아가는) 점진적인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부활" 신앙을
이야기할 때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열 개의) "소생/부활" 사건들 모두가 동일하게
가리키고 있는...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궁극적(窮極的)
구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9]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우리가 묵상한 (열왕기상 17장/ 누가복음 7장/ 사도행전
20장) 성경본문의 사건들은 "숨이 끊어진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소생(蘇生)과
부활(復活)의 기쁜 소식들 즉 복음(福音)입니다. 그런데 2020년 올해는 (예년과는 달리)
이러한 복음의 이야기들이 부활주일의 환희(歡喜)로 이어지지 않고 고난주간의 아련한
아픔의 연속선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날마다 "죽음"의
소식을 보고 듣고 겪어야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던 사도행전(Acts of the Apostles)에도 "소생과 부활"의
기적은 두 건 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 각각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갖가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도 바울도 유두고란 청년을 살렸던 것 외에는 죽은 자를
살린 다른 기록은 사도행전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의 서신서들
중에도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주간 목요일에 묵상했던)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겪었던 죽음에 관한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2020년) 고난주간을 지내고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시기적절(時期適切)한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머무르면서 성경말씀
강론을 통해 (특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개척했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7장 참조). 그후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성장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부활"과 관련하여) 성도들 간에 의문과 동요(動搖)(흔들림)에 대한 소식도 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성도들이 (한 명... 두 명... 세 명...)
죽음에 이르면서 살아 남아있는 성도들이 (부활에 관해) 가지게 된 의문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에 관해 다시금 계시의
말씀을 전하면서) 교회내에서 계속 겪게되는 성도들의 죽음 앞에서 (부활의 신앙이 없는
사람들처럼 절망하지말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참조). [2020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10]
내가 루이빌 대학병원에서 했던 병원목회실습 과정에서 역시 여러번 목격했던 일이
있습니다. 환자의 증세가 아주 위중해지면 의료진이 환자의 가족들에게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라고 통보합니다. 동시에 병원내 보안(保安)요원들에게 곧 운명(殞命) 하게 될
환자의 병실 주변에 와서 대기하도록 연락을 합니다. (환자의 가족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들인 경우에는 큰 슬픔가운데서도 환자의 침상 곁에
가족들이 둘러서서 차분하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눕니다. 한편으로 "부활의 소망"이
없는 경우에는 환자의 가족들이 영원한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때 닥치는 충격과
슬픔을 견디지 못해 돌발적인...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고난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영원한 새생명이 있을 것임을 믿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은 부활의 예시(例示)로 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과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전하는 사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의문을 품고)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 보다도 훨씬 더 동요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밝힌 사도 바울의 부활 신앙의 증언을 생각합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지 않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
그래도 (죽은 채로) 계신다면 우리가 전한 복음은 쓸모없는 헛된 것이며 여러분의 믿음
또한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다가
분명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잠든(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12-20참조). [2020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11]
(예년에는) 부활주일이되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웅장하고 경괘한 찬양곡들을
많이 불렀습니다. 하지만 올해 (2020년) 부활주일에는 우리들이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
(부활의) 감격과 환희(歡喜) 보다는 아련한 아픔과 슬픔과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으로 잔잔히 스며드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하는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모아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주님께 드립니다.

다시 사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온 세상 살펴보니 주 사랑 알겠네 / 내 맘이 아플 때도 주 사랑 알겠네
이 세상 풍파 이길 힘 주시는 주님 / 마침내 영광 중에 주님 오시리
예수 내 구세주 예수 /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아멘)




(설교칼럼) 여호와의 만찬 (이사야 25) (요한복음 11)
(설교칼럼) 먹이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7) (요한복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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