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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이상태(2020-05-03 00:03:54, Hit : 453, Vote : 9
 (설교칼럼) 여호와의 언약 (이사야 55) (마태복음 11)

주일예배 (2020/05/03)
가정예배 (강해설교요약)
본문성구: 이사야 55:3-6
설교주제: 여호와의 언약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3-6)


[배경(背景)]

[1]
지난 두 달 동안 매일 아침 뉴스를 접하면 언제나 첫 번째로 나오는 뉴스는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 관련 보도들입니다. 바이러스 감염병과 관련하여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문자로 쓴 문헌이 존재하지 않았던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즉) 선사시대
(先史時代)에 속하는 화석(化石)들 가운데서 이미 바이러스 급성감염에 의한 척수성
(脊髓性) 소아마비(小兒麻痺) (polio)에 걸려 한쪽 다리가 기형(畸形)인 인간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대형 DNA 바이러스에 의해 발병하는) 천연두(smallpox)는
기원전 3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고대 이집트의 미라(mirra/myrrh)에서도 발견되었고
여러 문헌자료들도 남아있습니다. 중세와 근세 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적으로
많은 인명(人命)을 앗아간 바이러스 감염병 발생 사례(事例)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 발생했던 바이러스 감염병 사례들과 비교해 볼 때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
발병한 "사르스(SARS)" "신종인풀루엔자 (H1N1)"  "메르스(MERS)"  그리고 지금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COVID-19) 바이러스 감염병은 발생의 주기
(週期)가 갈수록 짧아지고 변이(變異)를 일으킬 확률이 매우 높아지고 감염 확산의
속도와 규모는 점점 빨라지고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참고로 전염병이 전세계로 번져서 많은 인명피해를 내는 경우를 "pandemic"
(세계적 유행병)이라 부릅니다. 중세기의 흑사병(Black Death)과 1918-1920년의
스페인독감 (Spanish Influenza)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19 등이 대표적인 (세계적
유행병) "pandemic" 입니다. 한편 전염병의 피해가 특정지역에 국한되는 경우는
"epidemic"(유행병) 이라고 부릅니다. (2014년에) 아프리카 서부 지역에서 발생하여
(세계를 불안에 떨게 했던) "에볼라"(Ebola) 감염병은 (다행스럽게도) "epidemic"
단계에서 수그러졌습니다.  

(*) 코로나19의 경우에는 감염의 확산 추세 범위가 "epidemic"에서 "pandemic"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세계보건기구(WHO)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 인해 세계 많은
나라들이 초기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원성(怨聲)이 높습니다. 게다가
WHO는 얼마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돌머리"(석두)(石頭)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
으로부터 심한 박치기 공격도 받았습니다. ["돌머리"(돌"석" + 머리"두")는 순우리말
매운맛 "돌대가리"의 순한맛 버전입니다.]


[2]
(코로나19와 같은) 세계적 유행 감염병의 빨라지는 주기적 발병(發病)에 대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원인들을 추측하고 있는데 가장 많이 지적되고 있는 것은 인간
들에 의한 생태계(生態系) 파손(破損)/파괴(破壞)와 지구온난화(溫暖化)로 인해
생기는 기후의 변화 등입니다.

이런 뉴스 보도를 듣고 전문가들이 올린 글을 읽을때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
(天地創造)의 이야기 특히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의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한
기록이 생각납니다 (창세기 1장 참조). 지구의 자연 생태계가 경험하게되는 (심판의)
대홍수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대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생명체
들을 향해 하신 말씀도 생각납니다: "내가 땅 위의 모든 생물들과 언약(言約)을 맺으
리라 / 내가 나와 온갖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표시로 (하늘에)
무지개를 걸어 두리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내가 모든 생물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창세기 9:16).

지금 창궐(猖獗)하고 있는 코로나19와 관련하여 (특히) 미생물학자들과 환경학자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 으로 경고(警告)하고 충고(忠告)하는 말들이 자꾸만 생각납니다.
"인간들은 과도(過度)한 물질적 욕망(慾望)을 충족시킬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인류 문명의 발달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다른 생명체들의
서식지(棲息地)를 침범하고 생태계(生態系)의 질서를 파괴해 왔습니다. 그러한 인간
중심의 행동의 결과로 이런 무서운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인간들은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어떻게 공존(共存) (Co-existence)해 나갈 것인가를 깊이 고민
하고 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코로나 19와 같은 사태는 더욱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들과의 공존의 첫걸음은 우리 인간들의 욕망을 절제(節制)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지금 몸담고 살아 가고 있는 자연생태계를 어떻게 보존할까? 그리고
생태계에서 이미 파손/파괴된 부분들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 진지하게 서로
의견들을 나누어 보면 좋겠습니다.]


[3]
현대 인류 사회에서 자연 생태계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사람들은 남미(南美) 아마존 밀림(密林)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
입니다. 그런데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 사람들이 또 있는데 그들은 "아메리카
나바호 인디언 부족"(Native American Indian Tribe known as the 'Navajo Nation')
입니다. [참고로 '나바호'는 '넓은 들판' (wide field) 이란 의미입니다.]  이들 나바호
부족은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 부족들 가운데 가장 큰 부족으로 미국내에서 유일하게
연방정부로부터 공인(公認)을 받아 (아리조나 /뉴멕시코/유타의 3개 주에 걸친 지역에)
일종의 인디언 원주민 자치국(自治國)을 형성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뉴스
보도에 따르면  나바호 인디언 자치구역에서 (1인당) 코로나19 감염 확진자의 비율이
뉴욕과 뉴저지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나게 높다는 것입니다.

나바호 인디언 원주민들이 왜 이렇게 큰 피해를 겪고 있을까요? 가장 주된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예전에 나바호 부족을 비롯한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
왔던 땅을 미국연방정부의 소유로 넘기는 조약에 서명을 하였고 그렇게 토지 소유권
이전(移轉)을 해준 대가(代價)로 연방정부는 인디언 부족들의 복지(福祉)를 보장해
주기로 협약(協約)을 하였지만 미국연방정부가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All these issues can be traced to broken promises." More than
150 years ago, the Navajo and many other Indian tribes signed treaties with the
U.S. Federal Government giving up their land in exchange for funding of things
like housing, infrastructure and health care. But for decades that hasn't happened.
Now, the Navajo Nation is suing the Federal Government for what it calls its fair
share of federal COVID relief money. [(2020/04/27) NPR Morning Edition 참조)

(**)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갖가지 (크고 작은) 약속들을 합니다. 개인과 개인간 사이에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하는 약속으로부터... 국가 지도자들 간에 서명식을 가지고
맺는 조약에 이르기까지 많은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개인들과 국가들이 맺은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을까요? 인간 공동체의 생활에서 약속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招來)될까요? (각자가)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가? 나는 헛약속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닌가?" 등등 [곰곰히 생각하고 의견을 나누어 보면 좋겠습니다.]


[강해(講解)]

[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라 / 그 언약은 (옛적에)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나의 신실한 은혜라" (55:3).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서 "(영원한) 언약"이란
단어가 나올때면 먼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이브라함을 부르시고 (창세기
12:1-3),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창세기 15),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나타나셔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너와 맺은 이 언약은 너뿐만 아니라
앞으로 오고 또 올 세대인 네 후손들과의 [영원한 언약]이니라" (창세기 17:7 참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삭과 야곱과 대대로) 맺은 언약대로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통하여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드리고 그가 하신 일들을 뭇 나라 사람들
에게 널리 알릴지어다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전할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자신이 명하신 말씀을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생생하게
기억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편 105 참조).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다윗 왕과 맺으실 때 하신 말씀도 생각납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기를 갈망했던 다윗 왕에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성전의
건축은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알려주시고 (그대신) "너의 집안과 너의 나라가 내 앞
에서 영원히 이어지고 너의 왕권은 영원히 지속되리리라"라는 약속을 해주십니다
(사무엘하 7:16 참조). 이 약속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다윗 왕은 (후에) 그가
남기는 마지막 당부(當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도다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열매 맺게 해주시리라" (사무엘하 23:5).

다윗 왕이 죽어 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뒤를 이었던 솔로몬 왕도 죽은 후에...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남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왕국으로 쪼개어 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왕국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BC 722). 남유다 왕국도
결국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무너집니다 (BC 586).  


[2]
(지난주일에 언급했던 것처럼) (유다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유배/유수]는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제1차] 유배때 (BC 605)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
(선지자) 다니엘이 포함되어 있었고 [제2차] 유배때 (BC 597)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선지자) 에스겔이 포함되었습니다.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 지리라"고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예레미야 1:14) [제3차] 유배때 (BC 586)
가장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이 생각납니다. 시기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겨 주실것이라")고 예언함으로 유다 왕의 궁중 경비대 뜰 안에
감금되어 있을 때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다시 임하시고 똑같은 예언을
주십니다: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겨주리니 그가 차지
하리라...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끊임없이 가르쳤으나 그들이 내 훈계를 듣지
아니함이니라 / 그러나 ... 장차 때가 되면 내가 ... 멀리 쫓아 보냈던 온 세상 모든 곳
에서 그들을 다 불러 모아 ...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게 할 것이라 /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또 그날에 나는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라"  
(예레미야 32:26-44 참조).

그리고 또 생각나는 예언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앞으로 때가 차면
이루어질)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그 날이 오고 그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본토로 돌아오고 또한 유다 백성도 그들과 함께 본토로 돌아오리라
그때에 그들은 서로 말하리라: 오라 이제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주님과 연합하자 하리라 (예레미야 50:1-5 참조)  (**) [오래전에 (BC 722) 이미
멸망하여 뿔뿔히 흩어지고 역사에서는 "사라진 열개 지파 (The “Ten Lost Tribes)"
라고 불리우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백성이 유다 (왕국의) 백성과 함께 본토로 돌아
온다는 이 예언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다시 상기(想起)시켜 주시는 [영원한 언약]이 담긴 성경말씀도
생각납니다. 우리들에게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 환상"으로) 알려져 있는 예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 그날에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이 끌려가 살고
있는 온 땅의 뭇 민족들에게서 데리고 나오리라 뭇 나라들 가운데 흩어져 살고 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서 그들의 고향 땅으로 인도해 들이리라 / 이후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 / [그 날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니 그들은 모두 한 목자의 인도를 받으리라 ... 내 종 다윗은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될 것이라] / 그때에 내가 또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맺을 것인데 그 언약은 절대로
변치 않는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 내가 나의 처소를 그들 가운데 두어 그들과 항상
함께 있으리니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 그때에는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이 나를 여호와 인줄 알리라 /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에스겔 37: 21-28 참조).


[3]
역사적 시간의 흐름에서 볼 때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선지자로 활동했던 시기는
다윗 왕이 죽은 지도 몇 백 년이 훨씬 지난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 내가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다윗에게
약속한 확실한 은혜이니라"(55:3) (개역개정) 라고 예언하십니다.  (**)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서 "다윗과의 약속"은 과거형 시제(時制)로 ("옛적에 다윗에게 했던 약속"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 에스겔의 예언에서는 "그날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되리라" (에스겔 37:24-25)고 다윗에 관해 미래형(未來形) 시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에스겔이 각각 언급하고 있는 "다윗/ 다윗의 통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경 창세기부터 언급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everlasting covenant)]은
지속적(持續的)이고 아무리 상황이 바뀌어도 (새로운 상황에서 계속) 적용(適用)이 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The "eternal covenant" is longstanding and adaptable to any
evolving situations.)  

참으로 험난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歷史)를 살펴 볼 때 특별히 우리의 주목(注目)을
끄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겪어 온 충격(衝擊)적인 역사의
트라우마(Trauma)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절대자(絶對者)  
유일신(唯一神)으로 믿는 신앙(信仰)과 (그들은)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리는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전의) "바벨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Exile)"와 (과거 이천
여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특히) 중세 유럽 전역에서 팽배(澎湃)했던 "반유대주의 운동"
(Anti-Judaism & Anti-Semitism) 그리고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불리는)
히틀러 통치하의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Holocaust)(Final Solution)" 등등을
거치면서도 유대인들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앙(信仰)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세계종교역사에 있어서 불가사의(不可思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러한
저력(底力)이 도대체 (어디서/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쓴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이란 희곡(戱曲)이 있습니다. 작품속에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高利貸金業者)
샤일록이 등장합니다. [나는 어릴때부터 지금까지도 수시로 이 희곡을 읽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샤일록이란 인물에게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느꼈을까요? 이 작품을 읽어 본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느꼈습니까?"

중세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 전반에 걸쳐 팽배(澎湃)해 있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작품속에 면면히 깔려 있는가 ...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속에서 유대인을 혐오(嫌惡)하고
배척(排斥)하고 있는가 ... 아니면 유대인들의 입장에 서서 당시의 "반유대주의" 시대상을
암암리(暗暗裡)에 비판하고 있을까 ... 일반적으로 어떤 시대상(時代相)을 반영(反映)하는
문학 작품들이 독자(讀者)들의 사고(思考)와 인식(認識)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
특히 성경(聖經)의 이야기들은 어떠한가 ... 등등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4]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들이 네게로
달려올 것이라" (이사야 55:5 참조)(개역개정).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서 "알다 (to know)"
(또는 "알지 못하다")라는 표현이 나의 눈 길을 끕니다. 이사야서 전체에서 "알다 /알지 못
하다"라는 동사형(動詞)이 몇 번 나올까? [세어 볼려면 무슨 특별한 동기부여(動機附與)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연히 "노느니 장독 깬다" (또는) "노느니 염불한다"는 우리말 속담들이 생각납니다. 그냥
우두커니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심지어 말썽을 피우더라도)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인디애나주에도 (외출
금지령에 해당하는) "자택 대기(Stay at home)" 행정명령이 내려져 있는 기간 동안에 한번
카운트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요?  

(**) "하나 둘 셋 ... 열 ... 스물 ... 서른 ..." 끈기있게 헤아려보니 ... ("알다/알지 못하다")
동사형이 ()()번 정도 나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하루 날을 잡아서 각자의 인내력과 집중
력을 시험해 보며 이사야서를 일장일절부터 찬찬히 읽으며 "알다/알지 못하다" 동사형의
수를 세어 보면 어떨까요? "가시한테 찔려야 밤 맛을 안다"는 속담처럼 코로나19로 인해
이사야서를 한번 통독하는 보람을 맛보면 어떨까요...]


[5]
이사야의 예언에서 "알다/알지 못하다"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사야서가 시작되면서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啓示)라 (1:1) /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1:2) /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준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1:3).
(The ox [knows] his master, the donkey [knows] his owner’s manger, but Israel
[does not know]...) (Isaiah 1:3).  여호와 하나님을 (즉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歎息)(嘆息) 소리가 (이사야의) 예언들
속에 가득합니다.

<위로의 예언> 가운데도 여호와 하나님은 애타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듣지 못했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 /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困憊)하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명철과 지혜가 한이 없으시며 / 피곤한 사람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는 힘을 더하시는도다 / 비록 젊은이도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莊丁)이라도 넘어
지며 쓰러지되 / 오직 여호와를 앙망(仰望)하는 (소망으로 삼는) (경외하며 우러러보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구쳐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지치지 아니하고 걸어도 피곤(疲困)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1-31 참조).

<위로의 예언>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전능(全知全能)
하심에 대한 말씀들도 담겨 있습니다. 특히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들을 (바벨론)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에 관해 (이미 오래
전에 예언하시는) 내용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운 자 고레스에 대해 하신 말씀이라 ‘내가 그의 오른 손을 붙
들어 주어 그 앞에 모든 나라들을 굴복시키리라 ... /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지만] 내가
너를 불러서 너에게 높은 칭호를 준 까닭은 나의 종 야곱 곧 내가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라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이라 /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노라
비록 너는 나를 [알지 못하나] 내가 너를 강하게 만들고 네게 필요한 능력을 줄 것이라
그리하여 내가 너를 통해 나의 권능을 널리 나타내리라 ..." (이사야 45:1-8 참조).

(**)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그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고레스라는 이방 민족의 왕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알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고레스란 인물이 이 땅에 출현
하기도 전에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예언의 내용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또 <위로의 예언>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책망(責望)과 함께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구원계획을 그들이 [알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의 예언도 담겨
있습니다: "내가 옛적에 장차 일어날 일을 너희에게 미리 [알려]주었노라 / 보라 내가
이제부터 너희에게 새로운 일 네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주 비밀스러운 일을 [알려]
주리라 / 이 일은 내가 지금 시작하는 새로운 일이라 ... 이 놀라운 구원의 일은 내가
이제 막 시작하는 아주 새로운 일이라 ... 나는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반드시 이
새로운 일을 이루리라" (이사야 48:1-11 참조).  

(**)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알려주신] "이 새로운 구원의 일"에 관한 예언들을
우리들이 (04/21)화요일에 묵상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들과 (04/22)수요일에
묵상했던 선지자 에스겔의 예언들과 함께 잘 비교해 보세요. 이 세 명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뜻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을 것입니다]


[6]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고 전능(全能)하시고 전재(全在)하시다"라고 우리는
들었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存在)
하고 계시는데 ...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6)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서만 존재
하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우리 인간의 시공(時空)과 인식(認識) 인지(認知) 개념
에서 이러한 표현이 나온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을 의인화(擬人化)한 표현일까?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창세기 3:9) 하나님의 속성(屬性)이라고 우리가 알고있는 전재(全在)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용하고 있는 GPS (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성
위치 추적 확인 장치)의 기능이 물론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있는 위치를 이미 알고 계시면서 왜 이런 질문을 던지실까?

구약성경 지혜서 <욥기>의 말씀들을 다시 더듬어 찾아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아침마다 그를 감찰(監察)하시나이까? 주께서는 언제까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리이까? 어찌 하여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시나이까" (7:17-19);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피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원수대하듯 하시나이까?" (욥기 13:24);
"여호와께서는 땅 끝까지도 한 눈에 전부 바라보시고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을 빠짐
없이 두루 살펴보시나이다" (28:24).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말씀들도 생각납니다: "아 어디로 가야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수 있으랴 그 분이 계시는 처소로 갈 수 있으랴 / 그러나 그분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구나 앞으로 가도 그분이 보이지 않고 뒤로 가도 그 분을 찾을 수가 없구나 /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다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正金)
같이 되리라]" (욥기 23:3-10).

구약성경 <시편 139편>의 말씀도 조용히 읊어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
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편 139:1-8 참조).

성경학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추상적인)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The LORD is omniscient, omnipotent, and omnipresent. The LORD is immanent
and transcendent."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라는 이사야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과 관련하여 (때로는 매우 추상적인)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대해 (구체적이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체험들이 있으면
함께 나누어 보세요.]


[7]
유다 땅에서 (특히 예루살렘 성읍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성전에 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로인해 비록 그들이 "하늘과 온 땅에 충만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
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특정한 공간과 장소에
임재하시는 것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그들이 먼 이방 땅으로 끌려갔을 때에 [공간적인 개념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떠난다는 절망감(絶望感)과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셨다는)
허탈감(虛脫感)에 깊이 빠졌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구약성경에 담겨 있는 많은 시편
들과 예언서에서 이런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55:6)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과 연관되어 구약성경 <전도서>에 담긴 지혜자의 말씀이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습니다: "범사(凡事)에 다 기한(期限)이 있고 천하만사(天下萬事)에 다 적절(適切)한
때가 있나니 /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
찾을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으며 ... 싸울 때가 있고 화해(和解)할 때가 있느니라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
(思慕)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는
측량(測量)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인간의 생각으로는 헤아려도 알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1-11 참조).

선지자 이사야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호세야의 간곡한 음성도 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
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살리라 /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이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세아 6:1-3 참조).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55:6) 입술로
말씀을 읊조리며 다시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만한 (특정한)
때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실 때는 과연 언제일까?
그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니면 "만날 만한 때/가까이 계실 때"를 문학적인 표현으로
해석(解釋)해야할까?

지구 주위를 (거의 원에 가까운) 타원형으로 공전하고 있는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까운 지점
까지 올 때 (특히 그때의 달이 보름달일 때) 우리는 평소보다 엄청나게 크고 밝은 달을 볼
수 있는데 그 때 그 달을 우리는 [수퍼문(Super-Moon)]이라고 부릅니다. (천문학에서는
'수퍼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근지점'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특히 우리의 신앙생활/신앙여정(信仰旅程)에서 우리들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거리가 '근지점(近地點)'에 해당하는 그런 때가 즉 하나님이 수퍼문처럼 우리에게 가깝고
크게 환하게 느껴지는 그런 때가 있을까? 옛날 선지 에녹은 하나님과의 관계상의 거리가
어느 정도로 가까웠기에 하나님과 동행(同行)하였다"(창세기 5:24) 라는 표현이 나왔을까?
(히브리서 11:5-6 참조)

(육신의 병이나 정신적 심리적 고통 또는) 여러가지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신음하던
사람들이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았고 간절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간증(干證)을 많이 들었습니다. 구약성경 <시편>에는 위기(危機)상황 또는 한계(限界)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 부르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경험들이 있었는
지요? 서로의 경험을 나누어보세요. 저의 경우는 목회자칼럼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8]
일반적으로 교육학자들은 "인간은 유년기에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다. 그래서 유년기에
좋은 교육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유대인들의 가정교육과
신앙교육과 관련하여) 구약성경 <잠언서>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땅히 행할 (가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
하리라" (잠언 22:6).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행할 길/가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잠언(箴言)을 풀이
하면서 유년기(幼年期)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적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년(幼年)주일학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일리(一理)가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장년(長年)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일학교나 성경공부는 그다지 학습 효과
(學習效果)가 없을까요? 장년기(長年期)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라는 말씀을 적용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기일까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Old habits die hard")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생긴 버릇이나 (생활)습관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뜻으로 흔히 알고
있습니다. 이 속담을 생각하다 보니... 연상(聯想)되는 영어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You cannot teach [an old dog] new tricks." 그런데 이런 속담들은 “어린아이를
제때에 제대로 잘 가르쳐야 한다"는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일단 나이가 들면 즉 "꼰대"가 되면 교육과 학습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데 방점
(傍點) 이 찍혀 있는 것일까요?  

심리학(心理學) 학술지 <The Journal of Cognitive Neuroscience>에서 오래전에
실렸던 한편의 연구논문이 생각납니다. 그 논문은 미국의 Ivy League 에 속하는 어떤
대학교에서 행했던 "뇌작용"에 관련된 실험을 다룬 것인데 논문의 핵심 주장은 (위의
속담을 뒤엎는) (즉) "You Can Teach 'an old dog' New Tricks" ("늙은 개에게도
새로운 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성인이 되더라도 집중적
으로 무언가를 배울 때에는 뇌의 구조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최신 의학
기기들을 이용하여 뇌의 활동을 살펴 보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그들의 뇌도 어린이나 청소년의 뇌와 같이 학습 내용을 수용하는 부분이 매우
왕성하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는 이사야의
예언 말씀을 요즘 대학과 사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평생학습(continuing education)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평생을 탐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향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
니라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 11:27-30 참조).


[9]
(이사야서에 담겨있는 )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마태복음에 담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는 중에 (내가 예전에 책들과 여러 보도기사에서 읽었던) 어떤 사람이
나의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는 어릴 때에 미국 성공회(聖公會)에 속한 교회 (The Episcopal Church)에 다니며
어린이성가대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는 거의 무신론자(無神論者)가 되었습니다.] 그는 학부(學部)에서 화학(chemistry)을
대학원에서는 물리 화학(physical chemistry)과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생화확(biochemistry)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다시 의과대학에
진학하였고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유전학
(human genetics) 연구에 몰두하여 인체유전자 연구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체 유전자 정보지도(human genetic information map) 작성과 유전자 해독
등을 포함한 대규모 국제적 연구과제인 “Human Genome Project”를 총괄지휘하여
2003년에 완성하였습니다.

한편 스스로를 무신론자(無神論者)(atheist)라고 규정했던 그는 (불치병/난치병 진단을
받은) 환자들을 돌보면서 다시 신과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여러 종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로 알려진) C.S. Lewis 의 저서(著書)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Mere Christianity>
(우리말로는 <순전한 기독교>로 번역됨)에서 "자연세계의 현상들을 깊이 관찰해 보면
절대자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認定)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否認) 하는 것
보다 더 합리적인 선택이다"라는 C.S. Lewis의 말에 크게 공감(共感)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순수한 이성적 논리로 신의 존재를 인정(認定)할 수는 있지만 이성적 판단만
으로는 (유대교와 기독교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신/유일신으로 믿는 그러한
신앙(信仰)의 단계에는 도달(到達)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개인의 신앙고백(信仰告白)으로 이어지기 위
해서는 "믿음의 도약(跳躍)" (Leap of Faith)이 필요했습니다. 자연세계에 나타나는
현상(現像)들은 과학적 방법으로 측량을 하고 실험을 해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란 존재는 그렇게 과학적인 측량과 실험의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깊은 (영혼의) 갈등으로 고심(苦心)하던 중에 어느날
그는 산행(山行)을 갔습니다. 그가 쓴 글의 일부를 올립니다: “On a beautiful fall day,
as I was hiking in the Cascade Mountains, the majesty and beauty of God's
creation overwhelmed my resistance. As I rounded a corner and saw a beautiful
and unexpected frozen waterfall, hundreds of feet high, I knew the search was over.
The next morning, I knelt in the dewy grass as the sun rose and surrendered to
Jesus Christ.”  

간절히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속에서 오랫동안
찾고 부르던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 그리고 이른 아침 방울방울 이슬맺힌 풀잎들 위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영접했던 그 사람은
미국 과학계를 대표하는 기관들 중 하나인 미국국립보건원(the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NIH)의 총책임자인 프랜시스 콜린즈 박사 (Dr. Francis Collins)입니다.  


[10]
사회적 거리두기 (Social-Distancing)로 인해 사람들과의 대면(對面)접촉이 물리적으로
제한된 가운데 그동안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주변의 자연(自然)을 좀더 자주 살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코로나19로 인해 인간의 세계가 큰 타격을 입고 있는 가운데... 한편으로
(역설적으로) 자연의 세계는 파손된 것들이 다시금 조금씩 회복되며 생기(生氣)를 되찾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립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는 말씀을 가슴에
고이 품고...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로 회복되는 생태계를 찾아 밖으로 나가 보면 어떨까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아멘)




(설교칼럼) 여호와의 구원 (열왕기하 19) (마가복음 7)
(설교칼럼) 여호와의 외침 (이사야 55) (요한복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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