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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이상태(2020-05-17 00:03:55, Hit : 435, Vote : 5
 (설교칼럼) 여호와의 오늘 (여호수아 24) (누가복음 19)

주일예배 (2020/05/17)
강해설교: 여호와의 오늘
본문성구: 신명기30/ 여호수아24/ 누가복음19/ 히브리서3 /시편95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신 이가 계시니 이는 하나님이시라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시는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형제(자매)들아 너희들 중에 설혹 (믿지 아니하는) 완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가는 일이 없도록 항상 조심하라
성경에서 [오늘] 이라고 한 말은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라
(히브리서 3:4-15)


[# 자리이타]

[1]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료 방역 전문가들이 우려했던대로)
바로 얼마 전에 한국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 방역으로 전환이
되며 서울의 이태원 여러 유흥업소 출입자들에 의해 다시 지역 감염이 시작된 듯합니다.
이로인해 고등학교 3학년들의 등교(登校)수업 시작일이 다시 연기(延期)되었고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던 소상공인들 특히 자영업자들의 활동이 다시 심한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흥업소 방문자들의 비협조로 인해 역학조사가 힘들어지면서 코로나19가
다시 서울 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고 사회 전반에 미칠 큰 타격이 예상됩니다.

이번에 발생한 이태원 클럽 감염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것들 중에 하나는 대체로
젊은 층에 속하는 클럽 출입자들 상당수가 가지고 있는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적
(利己的) 생각입니다. 지금까지는 코로나19에 감염이 되어도 젊은 층은 무증상(無症狀)
이거나 증상이 나타나도 경미(輕微)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이러스에 노출이 되어도) 나만 무증상으로 아프지 않으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인해
가족들이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킬 수가 있고 이로 인한 "조용한 감염"의 여파
(餘波)가 엄청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일시적인 기분풀이"와 "사회공동체의 위생/일상생활의 회복" 사이에서 그들이
(습관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은 "개인의 일시적 즐거움"입니다.

[2]
전 세계가 코로나19를 겪는 중에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한자성어(漢子成語)가 생각
납니다. 앞으로 널리 회자(膾炙)되어야 할 말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내 것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이롭게 하면서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강조되고 있는 ["이웃 사랑 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레위기 19:18);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9)]는 말씀들과 일맥상통(一脈相通) 하는
황금률(Golden Rule)입니다.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그런데 이제는 우리 인간들간의 관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생태계(自然
生態系) 전반에 걸쳐 우리 인간이 "(다른) 모든 생명체의 존재를 배려(配慮)하는 (보살펴
주는) 마음과 태도를 가짐으로써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다"는 폭넓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참고로 (최근 뉴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오바마 (前)대통령은 "지금 미국이 겪고 있는
초유(初有)의 코로나19 피해 상황을 초래한 큰 원인은 현재의 트럼프 행정부내에서 작동
하는 '우리는 남들에게는 (다른 나라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닫힌 생각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이 이런 혼란스러운 재앙을 야기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모압 언약]

[3]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出埃及) 한 지 45일째 되던 날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그곳에
진(陳)을 치고 머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로 모세를 불러 십계명(十誡命)을
비롯하여 여러 법령(法令)을 주십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기록하고 이것을 백성들 앞에서 낭독(朗讀)하여 들려줍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遵行)하리이다"라고 서원(誓願)합니다. 이리하여 [출애굽 초기에]
광야생활 [1세대]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언약(言約)이 맺어집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언약을 "시내산 언약 (Sinai Covenant)"이라고 부릅니다. (출애굽기 19장 – 24 장 참조)

[출애굽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모압 평지
에서 광야생활 [2세대]에게 "시내 산 언약"의 내용이 세부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다시금
확증(確證)이 됩니다. 성경학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광야 2세대] 사이에 다시 확인된
이 언약을 "모압 (평지) 언약 (Moab Covenant)" 이라 부릅니다. (신명기 29장 – 32 장)

[4]
(2020/05/11) (월요일 묵상 성경본문) 신명기 30장에서 몇 가지 성경학자들이 주목
(注目)하는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모세가 행하고 있는 연설의 대상자(對象者)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사용한 "너"라는 단어는 2인칭(二人稱)
단수(單數) 대명사(代名詞) (The second person singular "You")입니다. 한편으로
모세가 백성을 빙의(憑依)하여 말하는 부분에서는 3인칭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
에게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주어 행하게 하랴" (개역개정) (신명기 30:12-13).
(**) [왜 신명기를 기록한 기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때 "단수 대명사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을 했을까요? 성경학자들의 논점들 중 하나입니다.]

또 주목할 점은 신명기에 담겨있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이미)
여호와의 [선택과 구원을 받은]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Deuteronomy is a
series of the words from God to God’s people (already chosen and redeemed)]
(신명기 7:6-11 참조). 즉 신명기의 말씀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는 관계를 시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져 있는 "선민(選民)"의 관계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순종 또는 불순종 여부에 따라) "어떠한 미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펼쳐질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모압 언약 (Moab Covenant)"의 내용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는 중에 나의 눈길을
끌었던 단어는 "오늘" (today/this day) 입니다. "모압 (평지) 언약"에 관한 기록은
이와 같이 시작됩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29:1).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지 아니한 자들
에게까지이니라" (29:14-15).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오늘"의 의미는 무엇일까?]


[# 선택 의지]

[5]
(2020/05/12) (화요일에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성경본문) 여호수아 24장은 구약성경
<여호수아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여호수아 24장에는 구약성경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말씀들 중 한 구절이 담겨있습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Choose today (this
day) for yourselves whom you will serve ... But as for me and my house(hold),
we will serve the LORD" (NKJV) (Joshua 24:15).] [여호수아가 강조하는 "오늘"의
의미는 무엇일까?]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자서전(自敍傳)에서 읽었던
내용이 기억납니다: "나의 아버지는 목사이고 나의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목사였다. 나의 동생도 목사이고 나의 아버지의 동생도 목사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餘地)가 없었습니다." ["(I grew up in the church.)
My father is a preacher, my grandfather was a preacher, my great-grandfather
was a preacher, my only brother is a preacher, my dad’s brother is a preacher.
So I didn’t have much choice." [From The Autobiography of Martin Luther King,
Jr. (1998)]

[과연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삶의 굽이굽이 마다) 크고 작은 선택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마틴 루터 킹
에게도 (목사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원래 변호사
(辯護士)가 되기를 원했었고 이로 인해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목사/설교자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설교의 마지막 부분이 생각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산 꼭대기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나는 산 위에서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나는
그 땅에 여러분과 함께 들어가지는 못할 듯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이 오늘밤에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약속의 땅에 반드시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밤 나는 대단히 행복합니다 ... 나의 눈은 (이 땅에 오시는) 우리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I just want to do God’s will. And He’s allowed me to go up
to the Mountain. And I’ve looked over. And I’ve seen the Promised Land. I may
not get there with you. But I want you to know tonight, that we, as a people, will
get to the Promised Land! And so I’m happy, tonight ... [Mine] eyes have seen
the glory of the coming of the Lord." [From Martin Luther King’s "I Have Been to
the Mountaintop" Speech (delivered on 1968/04/03)]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마지막 설교는 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의 마지막
모습을 연상시켜 줍니다. (신명기 34:1-4 참조) (**) 모세의 인생 여정...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생 여정... 나의 인생 여정 ...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여정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순간들이 있었고 앞으로 또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自由意志)와 하나님의 절대주권(絶對主權)의 상호 관계
(相互關係)는 신학자/성경학자들의 오랜 논점의 대상이요 불가사의(不可思議)입니다.
(**) (각자의) 인생 여정의 중요한 시점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과 결단을 위해서 밤을 새워가며 고민하고 기도해 본 일이 있었는지요?  
[서로의 경험들을 나누어 보면 좋겠습니다.]

[6]
여호수아 24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핵심은 "여호와를 섬기라" ("Serve the LORD")는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 여호와만 섬기라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4-15).

[참고로 (여호수아 24:14-18) 다섯 절 속에 히브리어 동사형(abad)(음역)이 아홉 번
나오고 명사형(abadim)이 한 번 나와서 모두 열 번이 나옵니다. 한글성경에 "섬기다"
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영어성경본에는 "to be a slave" "to serve" "to work for"
"to worship"등 여러 가지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섬기다"는 행위의 의미는
"노예상태"로 부터 "경배/예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우리의 "섬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요?]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와 백성들 사이에 오가는 말의 전체 흐름을 파악(把握)
하며 찬찬히 반복해서 읽어 보고 또 읽어 보는데 무언가 "꿀꿀하고 찜찜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여기저기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니이다" (24:18)
라고 입으로 맹세는 하는데 무언가 꿀꿀합니다. 이에 대해 여호수아가 응답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하리라..."(24:19). 백성들이 입술로 맹세는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백성들 가운데 여기저기 감추어져 있는) 무언가를
감지(感知)하고 있는 듯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을 백성들이 별로
원치 않고 있다는 것을 여호수아는 "(영)감"으로 느끼는 듯합니다.

여호수아의 말을 다시 꼼꼼히 들여다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24:15). "좋지 않게 보인다"는 말을 히브리어성경 원문에서
직역(直譯)하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해(害)가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
입니다. (**) [우리들 중에는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얻는 눈에 보이는 이득(利得)
보다도 손해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나요? 교회에 헌금(獻金)도 내야하고
시간과 노력 봉사도 해야하고... 하고 싶은 일도 절제를 해야하고... 신앙생활이 괜히
부담(負擔)스럽기만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는 없는지요?]

[7]
여호수아의 말을 더 직설적으로 옮겨 보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별로 이득(利得)은
없고 손해(損害)만 남는 장사/거래(去來)라고 너희가 생각한다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술로만 하지 말라 /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헛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중
에 가서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둥 "전체 분위기가 강압적이었다"는 둥 그런
변명을 하지 말고 분명히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군중 심리
(群衆心理)에 휩쓸리지 말고 타의(他意)가 아닌 자의(自意)로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도하에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출애굽) 제1세대가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쓰러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여호수아에게는
이제 가나안 정복이 거의 끝나고 지파별로 땅의 분배도 이루어진 시점에 (즉 어려운
시기가 거의 지나가고 어느정도 안정된 삶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출애굽) 2세대와
그들의 후손들이 제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이나고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되자마자 곧바로
이태원 클럽 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방역당국 책임자들의 심정이
바로 이러하지 않을까?]

여호수아의 경고에 이은 경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이 맹세에 맹세를 거듭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 우리가 증인이 되겠나이다." (여호수아 24:21-22).

[속속들이 완벽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방 신들에 대한 강력한 백신 예방 주사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맞출려는 듯이 여호수아는 경고(警告)를 되풀이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의 교훈을 수시(隨時)로 돌이켜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며... 생활방역에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합니다. 온 백성이 백신으로 집단 예방 접종(接種)을 실시하듯이 집단
신앙 방역 학습을 합니다. (*) [어릴 적에 학교에서 때를 따라 천연두나 기타 여러
역병들을 막기 위해 예방 주사를 맞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따금 나의 오른
팔 위쪽에 있는 천연두 예방 주사 자국을 만져보곤 합니다.]

[8]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맹세에 이어 여호수아가 하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다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24:23). 도대체 여호수아가 왜 이런 말을 할까? 궁금해
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을 듣고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무언가 짐작되는 바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유사한 상황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야곱과 함께 살고있던 가족들과 친지들 모두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갖가지 이방 신상들을 끄집어 내어 (그동안 거주했던) 세겜 땅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땅을 파고 묻었습니다. (창세기 35:1-4 참조)

창세기(35:1-4절)에 기록된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수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거치고... 광야에서의 생활을 거치고...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정복 전쟁상황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는지 집안 대대로 물려받았는지
아니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곳에 사는 가나안 거민들로부터 입수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때까지도 이방 신상들을 집안에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 [무엇에 비유를 하자면...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가 거의 무증상으로 아니면
경미한 증상으로 이때까지 잠복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맹세와 결단의 증거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함께 (그들이 그때까지도 비밀리에 숨겨 보관하고 있었던 이방 신상
들을 여기저기서 끄집어 내어) 상수리나무 아래 큰 구덩이를 파고 묻는 장면이
내 눈 앞에 그려집니다. 그리고 난후 여호수아가 큰 돌을 가져다가 상수리나무
아래에 (아마도 이방 신상들을 파묻은 그 구덩이 위에) 세워 증거의 돌판으로
삼았습니다. (여호수아 24:26-27 참조)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전체에 시행한 집단 예방 접종(豫防接種)과
철저한 신앙 생활 방역(防疫) 수칙 등이 가져다 준 효과를 <여호수아>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살아있던 날 동안 그리고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생존해 있던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들
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살아있었던 기간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수아 24:31).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살펴볼 때) 여호수아 24:31이 언급하고 있는 이 기간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가장 안정된 시기였었다"
라고 성경학자들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돌연히 나의 뇌리에 요한복음에 기록된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생명의 양식"에
관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서 여럿이 이 가르침을 듣고 (수군수군 거리다) 말합니다: "도대체
이 말씀은 뭐가 뭔지 참 어렵도다 누가 이런 것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있느냐?"
[그러고나서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그때부터 예수의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그를 떠나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내 곁을 떠나려 하느냐?" (요한복음 6장 참조)
[코로나19를 겪고있는 우리들에게도 던져지는 질문이 아닐까?]

[10]
여호수아 24장을 읽을 때마다 나의 시선을 끌었던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왕벌"이라는 단어입니다: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여리고성에 이르렀을때 여리고
사람들이 나와 너희와 맞서 싸웠고 또한...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나와 너희와 맞서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즉
내가 [왕벌]을 너희들 보다 앞서 너희 적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몰아내고 또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느니라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그들을 쫓아 낸 것이 아니었느니라" (여호수아 24:11-12) (신명기 7:17-24 참조).

[지난주일 우리가 함께 살펴본 <열왕기하 19장>에 기록된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나와서 앗수르 군대를 퇴각시킨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또 하나의 예(例) 일까? 과연 [왕벌]이 했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신명기>와 <여호수아기>에 언급된 [왕벌]은 글자그대로
곤충에 속하는 "벌"들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징
하는 비유적 표현일까?]

좌우지간(左右之間)에 "왕벌"에 대해 예전에 공부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어떤 성경본에는 "말벌"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의 파브르와 같은
곤충학자(昆蟲學者)들의 연구에 따르면 "장수말벌(King Hornet/Murder Hornet)"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벌의 종류 중에 가장 큰 벌인데 몸 길이가 대략 2인치 정도로
(보통 성인의) 새끼 손가락 만한 크기입니다. 말벌의 독침은 그 길이가 최대 10밀리
미터 정도로 한 번에 많은 양의 독을 주입할 수 있고 기관총 같이 여러 차례 공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장수말벌들 여러 마리에게 동시에 쏘이면 사람도 죽습니다.

장수말벌에 쏘였던 경험이 있는 사람의 증언이 생각납니다: “When the hornet’s
sting went into my arm, I had this wave – this wave came over me, and I got
super dizzy ... Almost I didn’t feel what was happening. And then the pain was
searing. My arm started to swell dramatically after just a few seconds... I began
rolling on the ground and screaming... It’s probably safe to say that a sting from
a murder hornet hurts like hell." [From Brave Wilderness]  

요즘 집안에 갇혀 있는 동안 유익한 심심풀이로 "벌"들에 관해 공부해보면 어떨까요?
땅벌/ 땡벌/ 땡비(Wasp)/ 꿀벌/ 말벌/ 호박벌/ 범블비 (bumble bee) 등등 공부할
거리가 참 많습니다. 범블비를 잠시 찾아볼려는데 ... 20세기 최고의 권투선수였다고
알려진 무하마드 알리 (본명은 케시어스 클래이)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

요즈음 자연 속에서 나비를 잘 보지 못했는데... 이제 눈여겨 찾아보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벌들은 아직 시기도 조금 이르고 또 직접 관찰이 아무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Flight of the Bumblebee)"을 통해 벌들의 윙윙
대는 소리를 집안에서 들어 보아야겠습니다. [참고로 <영혼의 울림>방에서 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구원 선포]

[11]
공관(共觀)복음서(Synoptic Gospels)에는 부자/관원/청년으로 지칭(指稱)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누가복음 18장/ 마태복음 19장 참조).
그가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永生)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 말씀을 듣고 그 부자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그 곳을 떠나갑니다.

부자는 "영생(永生)" 내지 "구원(救援)"에 대해 고심(苦心)을 하다가 예수님을 찾아 온
듯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고심했던 "영생/구원"의 온전한 길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지만... 그가 가지고 있었던 많은 재물로 인해서 "영생/구원"의 길을 선택하지를
못하고 떠나갑니다. (*) 부자가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모습을 볼때
마다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느니라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마태복음 6:24).["No one can serve two
masters...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ammon"](NKJV).

부자 청년이 떠나가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누가복음 18:17-25 참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란 제자들과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리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가복음 10:27);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누가복음 18:18-27). [참고로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공관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그후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2]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누가복음에 담긴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삭개오의 이야기의
연결(連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는) 재물이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뒤엎는 듯한
역설적(逆說的)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얼떨떨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도대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즉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겠는데요" 이지요)

어리뻥뻥해진 제자들과 무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구원에 관한] 그들의 의문(疑問)
에 대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누가
복음 18:26-27 참조). [Those who heard it said: "Who then can be saved? (No
body can be saved)" But Jesus said: "The things which are impossible with
men are possible with God.” (NKJV) (Luke 18:26-27)]

그리고 이어지는 (누가복음 19장에 기록된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님
께서 하신 말씀("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의 하나의 예(例) 내지 증거(證據)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게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향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선포하십니다: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19:5
& 9). [Jesus said to him: "Today I must stay at your house/ Today salvation
has come to this house!" (Luke 19:5, 9)] (**) 삭개오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담겨있기 때문에 만일 마가나 마태가 삭개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각각 그들의
복음서 어느 문맥에 ... 무엇과 연결지어 넣었을까... 궁금합니다.]

[13]
삭개오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성경학자들의 논점(論點) (논의의 중심이 되는 문제)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논점이 되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네 배로) 갚겠나이다"(19:8) (개역개정).

대부분의 한글성경에는 삭개오가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미래의 행동(future act
behavior)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영어성경 (번역본)들을 비교해보면
현재(現在)시제 또는 미래(未來)시제로 시제(時制)가 다르게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New King James Version 등은) 삭개오가 ("지금 이렇게 하고있다"는)
현재 행동으로 번역했습니다 ("Look, Lord, I give half of my goods to the poor;
and if I have taken anything from anyone by false accusation, I restore fourfold."
한편 (New International Version 등은)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미래 행동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Behold, Lord, half of my possessions I will give to the
poor, and if I have defrauded anyone of anything, I will give back four times
as much.")

[참고로]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동사형은 [현재시제]입니다. [The Greek Bible
has 'present tense' in Zacchaeus’ declaration statements. The use of the
Greek 'present tense' means that his commitment is ongoing, not something
he will do from now on. It may mean that he has already been doing this...]

삭개오의 말을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미래 행동으로 보면 전체 문맥의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우리가 흔히 듣고 있는 [죄인의 회개/결단]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구원]의 전형적(典型的)인 공식(公式)(salvation formula)에
잘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주고 있다"라고
삭개오가 (지금 행하고 있는) 현재 자선(慈善)행동으로 번역하면 삭개오의 이야기
전체의 해석이 [신학적으로] 몹시 미묘(微妙)해집니다.

(**) [이 부분은 성경을 좀더 깊이 연구하기를 원하시는 성도님들을 위해 (나름대로
망설이다) 소개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학자들의 논점사항이) 성경말씀을 조금씩
알아가는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직은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시면 (각처소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하시는) 성도님들이 이런 부분은 언급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14]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를 묵상할 때마다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만일 그가
날마다 일기(日記)를 썼다면 예수님을 만났던 그 날에 대해 어떤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을까... 예수님을 집에 모신 그 날 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삭개오는 어떠한 심정을 일기장에 토로
(吐露)했을까 ...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그에게...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로 그 순간 그의 심경이 어떠했느냐고 물었다면 그는 무어라고 대답 했을까?  

이렇게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나의 귓전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도다... 죄인들 중에 내가
괴수(魁帥)니라 (못된 짓을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였도다)" (디모데전서 1:15).

삭개오의 이야기를 묵상하는 중에 또 생각나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요즈음 한국
에서는 전국민에게 지급되는 긴급재난 지원금의 기부(寄附)를 둘러싼 논의가 좀
뜨겁다고 합니다. "자발적(自發的) 기부/ 선택적(選擇的) 기부/ 미신청(未申請)
기부/ 적극(積極) 기부/ 전액(全額) 기부/ 단체(團體) 기부/ 매칭 (matching)
기부" 등등... 게다가 "자발적인 듯 자발적이지 않은 기부" 등 말도 많고 표현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누가가 기록한) 삭개오의 자선(慈善)기부 발표가 만일 오늘날 뉴스에 보도된다면
사람들이 (특히 사이버 공간에서 누리꾼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삭개오의
기부를 하나의 본보기로 삼아 건전한 "기부 문화 조성 캠페인"을 시작하면 어떨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방식과 명목으로 사람들이 기부하는 사실(事實)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진실(眞實)을 말씀하실까?]


[# 카이로스]

[15]
(2020/05/17) 주일예배 강해설교 성경본문들 속에는 [오늘(Today)(This day)]
이란 단어가 다 들어있습니다. 신명기 29장과 30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가
언급했던 [오늘] /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가 강조했던 [오늘] /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늘] / 히브리서 3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오늘]
그리고 시편 95편에 나오는 [오늘]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단순히 어제/ 오늘/ 내일의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이따금 어떤 의도(意圖)를 담아 사용하는 "이제(부터)" 또는 "지금(부터)" 등등의
표현처럼 [오늘]이란 단어에는 무언가 중요한 결단(決斷)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그리스/헬라 사람들은 시간(時間)에 관해 두 개의 개념을 가지고 두 개의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카이로스(kairos)]와 [크로노스(kronos)]입니다. 지금도 나는
시간을 알고 싶을때에는 손목시계의 침을 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는 것
입니다. (일반적으로) 태양계내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의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하루가 오고 하루가 가고 (사)계절이 오고
가고 하는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한편 [카이로스의 시간]은 어느 특정
한 때 또는 적절한 시기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危機) 또는
기회(機會)라는 단어들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암시합니다.

[16]
자연히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특별한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 <전도서>에
"때"라는 용어로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에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서 3:1-8 참조).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정해진 때가 있고 ...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다 알맞은 때가 있느니라" ["To everything there is a
season, a time for every purpose under heaven." (NKJV)]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이라 할 수 있는 특별한 때가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때]는 바로 [카이로스의 순간/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In every age and
in every generation, there are moments which we may call 'today." Such
a moment is a 'kairos' moment/time.]  (**) 각자의 삶 속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인 [오늘]이 있었는지요? 각자의 신앙 여정에서 [카이로스]의 [오늘]이
있었나요? 각자가 경험했던 [카이로스의 시간]을 함께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지난 주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묵상을 위한 성경본문에서 계속
언급되었던 [오늘]이란 단어는 의도적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대와 소망 새로운 시작"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해서 앞으로 적절한 때가 다가오면 그때
마다 깊이 있게 계속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주님의 날]

[17]
지난 주간 매일 우리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말씀들을 [오늘] [주님의 날]에
우리들 모두 함께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다시 깊이 새겨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찬송의 시를 지어 즐거이 노래하자
오라 우리가 모두 엎드려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들이라 너희가 [오늘] 여호와의 음성을 들을지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참된 안식을 얻으리라)

새로이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날마다 주님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
들을 믿음으로 맞이합니다. 주님의 귀한 음성을 듣는 [오늘]로 맞이합니다.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오늘 하루의 시작은 기도로 하고 / 오늘 말씀의 은혜로 하루를 살고
오늘 내 입이 하나님 찬양을 하면 / 난 주님의 사랑을 받을 사람
나의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고 / 나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의 자녀를 위하여 기도를 하면 / 난 주님의 사랑 받을 사람
매일 이렇게 살아간다면 / 주님의 신실한 청지기 될 것이니
주여 내 삶을 인도하소서 / 주님의 제자 되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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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여호와의 구원 (열왕기하 19) (마가복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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