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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이상태(2020-07-27 17:58:08, Hit : 628, Vote : 82
 (열린칼럼) 영혼의 깊은 밤에 (#2) (사도행전 9/22/26)

(강해설교) 영혼의 깊은 밤에
(성경본문) 사도행전 9/22/26


[5]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 온 몸을 벌벌 떨면서) ("trembling
and astonished") 사울이 (죽은 듯한 음성으로)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9:4-5) (22:7-8) ["박해" (迫害)(핍박할박+해할해) 또는 "핍박" (逼迫)(핍박할핍
+핍박할박) 이란 단어들은 주로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학자들에 따르면 사울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기간 동안에)
한번도 직접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사도행
전에) 처음 등장할 때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이기 때문에 그가
(물리적으로) 예수님을 직접 박해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는냐?"고 물으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동일시(同一視)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포도나무) 가지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울이 ([참]
포도나무의 가지들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열매 맺지 못하게 괴롭히는) 진딧물과
같은 "해충(害蟲)"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뇌리에 이런저런 성경구절들이 떠오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시고 ... 그들을 구원하시고 ... 그들을 안으시니라" (이사야 63:9);
"너희가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31-46 참조)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는 말씀을 듣는 순간 과연
사울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번에는) 또렷한 의식속에서 기절(氣絶)(기운기
+끊을절) 초풍(風)하지 않았을까?  (한편으로) 이 순간이 사울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은혜로) 그를 부르시며 ... 그의 영혼속으로 깊이 들어오시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갈라디아서 1:6 참조)  


[6]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됩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26:14).
누가가 기록했던 사도행전의 원본(原本)(original copy)은 지금은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본을 손으로 다시 복사 기록한 사본(寫本)들은 아직도
여러 개가 남아 있어서 학자들이 사도행전을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본들 중에는 (우리가 읽고 있는 사도행전에는 26장 14절에 담겨있는
말씀이 9장 5절에 나와있는 사본들도 있습니다. [강해설교를 위해 사도행전 9:5
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 봅니다.]
    
[가시채]는 가축을 앞으로 몰아가기 위해 사용하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입니다
(사사기 3:31; 사무엘상 13:21 참조). 소(들)에게 쟁기 같은 농기구를 매어 논과
밭을 갈 때 소(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을 때면 이 뾰족한 막대기로 소(들)을
쿡쿡 찔러 농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고 제대로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하신 말씀에서 "가시채를 발로차다"라는 표현은
격언(格言)에 자주 등장하는 비유법입니다. 히브리/유대 격언들 보다도 오히려
헬라문화권의 격언이나 속담에 더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소를 몰아본 사람
이라면 문화권을 막론하고 고개를 끄덕일 듯한 표현입니다.]

격언에서 "가시채"는 "양심의 가책" (prick of conscience)이라는 의미로 사용
되기도 하고 "배우자의 잔소리" (nagging of a mate) 등의 의미로도 쓰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충고"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찌르는 가시채/채찍처럼 사람들을 일깨우고 (지혜로운
사람의) 잠언들은 단단하게 잘 박힌 못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머릿속에 깊이
박히느니라. 이 모든 것은 다 이스라엘의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
(전도서 12:11 참조)

사도들이 박해를 당하기 시작할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기관인 공회의 위원들이 사도들의 변론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일려고 할
때... 사울의 스승이었던 (그당시 가장 존경을 받던 유대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이 사람들을 그냥 두고 지켜봅시다. (만일)
그들의 사상과 행위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들이 결국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것이라면 우리가
그들을 막을 수가 없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사도행전 5:38-39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한 지혜자
가말리엘의 지혜로운 말은 (그의 수제자에 해당하는) 사울에게는 "가시채"와
같은 말씀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스승 가말리엘의 그 지혜로운
말씀 "가시채"를 마구 뒷발질하며 자기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대로
(나사렛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박해를 더해 갔던 것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너만 몹시 다치느니라)" 조용히
타이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바로 이 순간 사울에게 그가 따르고 존경했던
스승 가말리엘의 충고를 생각나게 하지 않았을까?]


[7]
한참 후에 사울이 땅에서 겨우 일어나 눈을 떴으나 눈 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9:3). (하늘에서부터 비추었던 그 강한 빛으로 인해) 사울의 시력이
상실(喪失) (잃을상+잃을실) 되었습니다. 그가 보았던 초자연적 광채로 인한
육적 시력 상실은 그에게 지금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히 꿈이나 공상(空想)이나 상상(想像)의 차원이 아닌 초현실적(超現實的)
현실 (supernatural reality)이란 것을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한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내가 종종 뇌리에 떠올리곤하는 초현실적 시입니다.
What if you slept
And what if in your sleep you dreamed
And what if in your dream you went to heaven  
And there plucked a strange and beautiful flower
And what if when you awoke you had that flower in your hand  
Ah, what then? [Samuel Taylor Coleridge]

[참고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시력 상실은 (시력이 회복된 후에도) 그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을 다른
사람에게 대필(代筆)시키고 (그것이 자기의 뜻과 생각을 그대로 담은 편지인
것을 수신인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하여) 마지막 인사말은 손수 쓴 듯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7 참조). 그리고 바울이 직접 자기 손으로 쓴 글자들은
대체로 큼직큼직했던 듯합니다 (갈라디아서 6:11 참조).

특히 성경학자들의 눈길을 끄는 바울 서신의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 성도들이
잘 알다시피 내가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의 약함
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 육체의 약함이 여러분에게는 시험 거리가 되었을 터
인데도 여러분은 나를 업신여기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두 눈이라도 기꺼이 빼어 나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13-15 참조).

앞을 볼 수 없게된 사울은 결국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9:8). 초대 교회를 박해하는 캠페인의 선봉(先鋒)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지휘
하고... 다메섹으로 향해 가는 박해팀을 인도하는 리더의 역할을 했던 사울이
이제는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때마다 비틀
거리며 넘어질 듯...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8]
다메섹으로 이끌려 들어간 사울은 ["직가"거리 (the Street called "Straight")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사울은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음식을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며 기도를 합니다 (9:9).

육신의 시력 상실은 사울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영적 무지함을 깊이 깨닫게
해주었을 것같습니다: "내가 한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26:9). [His "physical
blindness" becomes a fit representation of his "spiritual blindness" which
he afterwards deplores: "Indeed, I myself thought I must do many things
contrary to the name of Jesus of Nazareth" (Acts 26:9).

사흘 이란 기간은 사울에게는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온 길과 신앙과 모든 (율법)
행위를 성찰(省察) (살필성+살필찰) 하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2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부르는 그대는
... 자부하기를 율법에 따라 가르침을 받아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를 잘 알고 또 무엇이 지극히 선한 것인지를 분별할 줄 안다고 합니다. / 게다가
율법을 통하여 진리와 지식을 다 알고 있으므로 어리석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어린아이처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자신합니다 (......)

'하나님을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
면서 왜 자신은 그 율법을 어겨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그렇기에 '너희 때문
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욕을 먹고 있다' (이사야 52:5) 라고
기록한 성경 말씀이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로마서 2:17-24 참조). [이 말은
바울 사도가 과연 누구를 향하여 하는 말일까요?]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 사흘 동안에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부터 완전히
단절된 가운데)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과의 깊은 영적인 교류가 사울
에게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 사울이 이 기간 동안에 일련의 놀라운 환상들을
보지 않았을까 ... 추측을 합니다. (에스겔 8:1-4 참조)


[9]
"(영혼의) 어두운/깊은 밤 (Dark Night of the Soul)"이란 표현이 나의 뇌리에
떠오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보면 "영혼의 어둡고 깊은 밤"을 체험을 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표현은 "십자가의 성자 요한 (St. John of the Cross)"
으로 알려진 16세기의 신비주의 성자 시인이 쓴 한 시의 제목에서 유래(由來)
했다고 합니다.

"어두운/깊은 밤"은 인간의 영혼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신비로운
결합으로 가는 긴 여정을 의미합니다. "어두운/깊은 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인간이 찾고자 하는 최종 목표인 절대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들의
능력과 이성과 지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Dark Night" represents the fact that the ultimate destination – God – is
unknowable.]

그러나 "영혼의 어두운 밤"은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고해 (人生苦海)"처럼
인생의 어려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이 경험하는 "어두운
(깊은) 밤"은 우선 절대적 존재인 신과의 만남으로 가는 과정에 있어 꼭 필요한
(영적)"씻음"(purgation/cleansing)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영적 "씻음"은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인간이 (절대적 존재인)
신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가는 과정의 첫 단계입니다. 그후에 오는 단계는 영적
"깨달음(illumination)"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만남
그리고 함께 거함 (union/abiding)"이 이루어집니다.

사울이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먹고 마시지도 아니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특히 "씻음과 회개"의 시간을) 깊이 경험하였다면... 아마도 같은 시간에
사울과 같이 "영혼의 깊고 어두운 밤"을 보낸 사람이 있습니다. 다메섹에 살고
있던 아나니아라는 이름의 성도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영혼의 깊고 어두운 밤"
의 단계는 사울과는 조금 달랐던 듯합니다. 아나니아는 "씻음과 회개"의 시간
보다는 "애통과 애곡(lament)"의 시간을 주로 보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이란 핍박자가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는 공문을 발부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의 위태로운 상황을 생각하며 애통하고 애곡하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영혼의 깊고 어두운 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를) 환상을 통해 깨달아 알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rhema")를 마음 속에 담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핍박자 사울을 찾아 갑니다.
즉 아나니아는 이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동거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우리들도 각기 나름대로 "영혼의 깊고 어두운 밤"을 경험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회개와 씻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삶의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위해) "애통과 애곡"도 필요할 것입니다. "회개와
씻음" 그리고 "애통과 애곡" 가운데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 하나님 아버지의 처소에서 영원히 함께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열린칼럼) 독수리 날개로 업어 (출애굽기 19/20/29)
(열린칼럼) 영혼의 깊은 밤에 (#1) (사도행전 9/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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