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게시판 교회일정 | 공지사항 | 목회자칼럼 | 두란노강론 | 블룸찬양대 | 교우소식 | 영혼의울림
교회 게시판 블룸선교회 | 청년대학부 | 중고등부 | 유년주일학교 | 블룸도서실 | 사진방
열린 게시판 교회소개 | 연락처 및 약도 | 유학도우미 | 자유게시판
목회자칼럼


  이상태(2020-11-11 20:57:40, Hit : 653, Vote : 65
 (열린칼럼) 거룩한 산 아래서 (마가복음 9) (로마서 8)

(강해설교) 거룩한 산 아래서
(성경본문) 마가복음 9


[1]
이튿날 산에서 내려 오시니 큰 무리가 (그를) 맞으니라 (누가복음 9:37)
그들이 (산 아래 머물러 있던)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마가복음 9:14).

공관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서만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이튿날" 내려
오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변형이) 낮이 아닌
밤에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이 될수 있는 실마리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만이 산 아래 무리들 가운데 "서기관들"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서만 산 아래 모여 있던 무리가 예수님께로 달려와 "문안"
(問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무리들 가운데는 (갈릴리에서
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그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2]
마가복음서는 "온 무리가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니라"
(9:16)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매우 놀랐
을까"? 산 아래 남아있던 제자들이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지켜보고 있는 서기관들과 무리들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때마침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에 대한 기쁨의 놀라움일까?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우리말/영어로) "놀라다"(greatly amazed)로 번역된 헬라어의
의미는 "경외감과 두려움"이 섞인 (mixed of astonishment and fear)
"놀라움"을 표현합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그런 놀라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변화산에서 일어난 사건의 잔상이 예수님의 얼굴이나 몸(옷)에
남아 있었을까? 마치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서 비추이는 광채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했던 것 같은 그런 "놀라움"이었을까?
(출애굽기 34:29 참조).

아니면 변화산 위에서 일어났던 변형 후에 산에서 내려오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어떤 "결의"(決意)(결단할결+뜻의)가
느껴졌을까? 마가복음에 기록된 (변화산 사건 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에서 동일한 헬라어가 사용된 어떤 상황이 있는가를 살펴보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걸어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 (개역개정) ["모두들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뒤따라가더라"
(쉬운말성경)] (마가복음 10:32 참조).


[3]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니라"(9:16)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And He asked them) "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마가복음의 원본을 복사한 오래된 여러 역본들을 살펴보니
"그들"에 대한 해석번역이 다양합니다 (1) 산 아래 남아있었던 제자들;
(2)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문안하는) 무리들; (3) (아홉 명의 제자들과
변론을 하고 있던) 서기관들 등등 ...

(나의 눈을 감고) 당시의 그 현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누구에게로 향하는가를 면밀히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를 주욱 둘러보시며 ...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의문을 불러
일으키는 삼인칭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서기관들을 향할 때 그들이 잠잠합니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들은 (예전에 몇 번씩이나)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 나름대로
대답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코가 납작해지는 경험들을 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제자들을 향할 때 (예수님의 눈길을 피하며) 그들이
잠잠합니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셔서... 전도여행에서
많은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었는데...) 간질병(귀신) 들린 아이를 앞에
두고는 그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무능함에 대한) 자책감에 눌려
있는 듯합니다 (마가복음 6:7-13; 마태복음 10:1; 누가복음 9:1-6)


[4]
예수님의 눈길이 서기관들을 향하다가 ... 제자들을 향하다가 ... 이제
무리를 향할 때 ... 무리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어 대답합니다: "선생님,
제가 제 아들을 선생님께 보이려고 데리고 왔습니다. 내 아들이 귀신
들려 말을 못합니다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에 잡혀 있습니다)" (9:17)

참고로 마태복음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미치고) 간질로 심히 고생하고
있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Matthew records that the man came
kneeling down to Him, saying, "Lord, have mercy on my son: for
he is an epileptic (lunatic) and suffers severely" (Matthew 17:15).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고통스러운 간질 증상에 대해 자세히
묘사합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아이가)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해지나이다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
지나이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마가 9:18) (마태 17:15)  

아이의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앞에서 언급되었던) 서기관들이
(아홉 명의) 제자들과 변론한 주요 쟁점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해 미루어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에 관한 논쟁이었을
것 입니다. (이전에 이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현장을 목격하고서는...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는다"고 공격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3:22-30 참조).  


[5]
(귀신을 내쫓는 일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9:18)
라는 (아이의 아버지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9:19).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구를 향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다시 나의 눈을 감고 사건의 현장으로 가서 상황을 면밀히 살펴 봅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어디로 누구에게로 향하는가를 지켜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일까? (논쟁하러온) 서기관들일까?. 그곳에 모여 있었던
무리일까? 제자들일까? .... [아니면 (긴 시간과 넓은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우리들의 세대를 가리키시는 것일까?]


[6]
예수께서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으십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아이의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어릴 때부터니이다 ..." (마가복음 9:21).
어릴 때부터 아이의 고통을 지켜보았던 아버지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If You can do any thing, have compassion
on us, and help us)" (9:22)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여행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중병을 고치는 것을 직접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런 일들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전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아이의 병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몹시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내 아들의 병은 아무도 고칠 수 없는 것인가... 내 아들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은 너무나 강해서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만일 선생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가 있으시면...) 이라는 그의
말에서 무언가 떨쳐지지 않는 불안감 ... 일말의 기대 ... 소망적 사고 ...
밀려오는 초조함... 등 참으로 다양한 감정의 교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7]
아이의 아버지의 간곡한 흐느낌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9:23). [참고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는 <개역개정>번역을
<표준새번역>과 <공동개역개정판>의 번역들과 비교해서 살펴 봅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표준새번역)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공동번역개정판)

우리말 번역이 주는 어감은 예수님께서 아이의 아버지를 조금 (엄하게)
나무라시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헬라어 표현은 한글이나 영어로 번역하기에는 매우 힘든 구조입니다.
"하실 수 있거든" (이라고) 아이의 아버지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그래로
다시 사용하시는데 앞에 [정관사]를 붙여 인용하시는 문장 구조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nd Jesus said
to him: "[The]'if you can,' all things can be to the (one) believing."  
우리말로 해석/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방금 내게 했던 그 말)
'할 수 있거든'(에 대해 내가 대답하겠노라).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즉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가 치유되리라는 것을 즉 예수님
께서 아이를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의미입니다.  

[It is difficult to explain the force/role of the Greek definite article here.
Jesus takes up literally the word spoken by the father, and repeats it
with an emphasis, in order to link its fulfillment to the petitioner's own
faith. There is a play upon the Greek words δύνῃ (= can) and δυνατὰ
(possible) which cannot be neatly rendered into English or Korean.]


[8]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이 없음"을 꼬집어 나무라시는 듯한인상을 강하게
주는 일반적인 해석과는 다른 듯한) 느낌을 (예수님의 "잔잔한" 음성에서)
내가 받고 있는 가운데 ... 아이의 아버지의 소리가 들립니다. 마가는 "곧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9:24) 라고 기록했습니다 (개역개정 번역참조).

그런데 마가가 사용한 헬라어 단어들과 문맥의 해석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소리를 질렀다(라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확히 분별할 수 없는) "소리를 지르고" (이어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간구했다 라는 번역도 문맥상 가능합니다. 이 둘 중에서 내가
선호하는 번역은 후자입니다.

Immediately the father of the child [cried out] and said (κράξας ......
ἔλεγεν). The immediate "crying out" denotes some inarticulate cry or
some ejaculation (hard to express in words). Then, it is followed by
the words, "Lord, I believe." The father’s crying is making the most of
something throbbing in his heart and mind, something inexpressible...


[9]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며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9:25).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그
아이에게 심한 발작과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떠나갑니다 (9:26). 땅 바닥
위에 쓰러진 채 죽은 듯이 누워있는 아이의 손을 예수님께서 잡아 일으켜
세우십니다 (9:27).

(거룩한 산 아래서 그 아이를 일으키시고 그 곳을 떠나) 예수님께서 어떤
집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9:29) 예수님께서 그들
에게 대답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의 귀신이 나갈
수 없느니라" (9:29)

지금까지 살펴 보았던 마가복음 성경본문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의
기도가 있었던가? 귀신을 쫓아낸 그 능력의 기도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그 아이의 아버지가 질렀던 (말로 표현되지 않은) 그 소리는 무었일까?


[10]
바울 사도가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들 가운데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무엇이라)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에
성령께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신음/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주십니다" (로마서 8:26 참조) (아멘).




(열린칼럼) 여기를 떠나서 가라 (열왕기상 17) (히브리서 11)
(열린칼럼) 변화산 위와 아래 (마태복음 17) (출애굽기 15)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ro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Bloomington - 블루밍턴 한인 장로교회